뮤지션 ‘요조’의 청춘 에세이: 우리 둘이서 -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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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하얀색 마티즈. 백기녀(어머니)가 뽑아줬다. 내 쪽에서 바란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매니저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홍대에서 당시 살던 도봉동까지 오다가 집 앞에서 백기녀에게 발각된 후, 며칠도 안 되어 차가 생겼다. 헬멧도 없이 위험천만하게 홍대를 오갈 거라면 차라리 차로 다니는 것이 죽을 확률이 덜하겠지, 라고 백기녀는 생각한 것 같다. 신수현(동생)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그런 식의 사고가 자연스러웠던 때였다. 백기녀가 얼마나 급하게 차를 뽑아왔는지 차에는 옵션이 하나도 없는 채였다. 뒷좌석 창문을 열려면 수동으로 돌려야 했고, 카오디오는 카세트테이프만 플레이할 수 있었다. 그래도 몇 년간 그 차와 각별하게 보냈다. 이민석이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정처없이 여행도 가고 그러다 밤이 되면 그 안에서 잠도 자고 밥도 먹고 노래 연습도 하고 울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옆에 앉혀 손도 잡고 그보다 더한 것도 했다.

지금은 차 없이 지낸다. 조금 있으면 차 없이 지낸 지 10년이 된다. 운전이 그리울 때가 있다. 여러 번.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면서도 그랬다. 

▲<드라이브 마이 카> 포스터 (출처: 다음 영화)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오프닝 시퀀스라고 대답하고 싶다. 주인공 가후쿠가 아내 오토를 떠나 보내고 2년 뒤, 차를 몰고 달리는 모습을 길고 여유롭게 보여주던 장면들. 

운전을 하다 보면 점점 회색을 사랑하게 된다. 아스팔트의 회색은 전천후 파트너다. 노란색이나 흰색의 도로선과도, 주변에 자라나 있는 녹색의 나무와 잡초들과도, 공사 현장을 지날 때마다 볼 수 있는 종종종 세워진 붉은 고깔과도, 한 켠에 미처 녹지 못한 눈과, 햇빛이 만드는 그림자와도, 아스팔트는 그 모두와 조화롭다. 운전할 때마다 하던 생각을 영화가 오랜만에 상기시켜주었다. 

이 영화는 죽은 아내에 대한 상처를 지니고 있는 가후쿠가 비슷한 아픔을 지닌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를 만나 조금씩 마음을 열고 서로의 슬픔을 공유하며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는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상처의 치유’보다도 대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영화 속에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대화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와 드라마 작가인 아내 오토의 대화는 주로 두 가지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섹스로써이다. 4살 된 딸을 잃은 큰 아픔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은 섹스를 통해 무너진 관계를 회복한다. 그 과정에서 둘 사이의 독특한 대화법이 형성된다. 오토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섹스가 주는 황홀경 속에서 읊조리고 가후쿠는 그것을 기억했다가 다음 날 다시 알려준다. 오토는 가후쿠가 알려주는 이야기를 기록했다가 드라마 대본으로 활용한다. 

가후쿠는 평소 운전하며 늘 테이프를 틀어놓는다. 가후쿠가 외워야 하는 극의 전체 대본을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한 테이프이다. 가후쿠는 그 테이프를 반복해 들으며 자신의 대사를 아내와 맞춘다. 가후쿠는 아내가 작업하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과 외도를 벌이는 것을 진즉부터 알고 있고 어쩌면 오토도 가후쿠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두 사람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본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만을 주고받는다. 가후쿠와 오토의 대화는 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겉보기에 평화롭고 안정적이지만 두 사람은 자기들이 서로 얼마나 겉돌고 있는지 결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한 장면 (출처: 서울독립영화제)

오토가 죽고 2년 뒤, 가후쿠는 홋카이도 지역의 연극제에 <바냐 아저씨>의 연출가로 참여한다. 출연하는 배우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일본어, 한국어, 영어, 만다린어, 타갈로그어, 인도네시아어, 독일어, 말레이시아어, 광둥어 그리고 한국 수어. 그들은 대본 리딩을 하며 조금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방 언어를 열심히 듣는다. 뜻을 모르더라도 소리나는 발음에 대해서는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 대사를 정확한 타이밍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겉으로 보기에 대화처럼 보이는 연습을 반복하던 어느 날, 상이한 언어를 쓰는 두 배우가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가후쿠는 이것을 보며 ‘뭔가가 일어났다’라고 설명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대화가 꼭 말이 통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배우 중에는 한국 수어를 사용하는 이유나가 있다. 어느 날 가후쿠는 공연을 돕는 스태프인 한국인 공윤수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게 되는데, 거기에서 이유나가 공윤수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공윤수와 이유나는 한국어와 한국수어로 대화를 나눈다. 이유나에게는 들을 수 있으나 말할 수는 없는 장애가 있다. 이유나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공윤수는 그길로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공윤수는 언어 감각이 탁월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인 것 같다. 일본어도, 한국 수어도 능숙하다.
이유나는 그렇지 않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공윤수와 가후쿠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눌 때 이유나는 ‘내 얘기 하는 거 맞지?’라고 한국 수어로 묻는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둘 사이의 대화에 어느 한 쪽만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는 느낌을 받는다. 이유나가 어서 일본어와 일본 수어를 공부하면 좋겠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어를 모르고 수어마저 한국수어를 사용하는 이유나는 그곳에서 철저하게 약자에 속하고 그만큼 공윤수에게 더 많이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 불균형적 소통방식이 언제 본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지 알 수 없다. 인간은 갑자기 죽어버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오토처럼. 

가후쿠는 홋카이도에서 전속 드라이버를 어쩔 수 없이 고용한다. 그 드라이버는 여성이고 이름은 미사키이다. 가후쿠와 미사키의 대화는 동등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운전하는 미사키의 무덤덤한 옆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일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미사키는 가후쿠에게 일부러 웃어 보이지 않는다. 용모단정해 보이기 위한 화장을 하지 않는다. 과장된 높고 친절한 톤으로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늘 날씨 너무 좋네요!’ ‘오늘 정말 멋져 보이세요.’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하고 성실하게 운전만을 한다.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바라는 것 역시 자신의 소중한 차를 잘 운전해주는 것뿐이다. 좀 더 꾸미고 와주었으면, 좀 더 친절하게 굴었으면 같은 생각은 애초에 할 줄 모르는 사람 같다. 둘 사이에는 불필요한 대화가 없다. 꼭 필요한 말만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주고받는다. 그래서 대화 사이에 흐르는 긴 침묵 역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만들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두 사람은 침묵으로 대화하며 가까워진다. 

삼촌,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을 끝까지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꾹 참아 나가는 거예요. 우리, 남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기로 해요. 앞으로도, 늙어서도 그러다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요. 그리고 무덤 너머 저세상으로 가서 말하기로 해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우리가 얼마나 울었고 슬퍼했는지 말이에요.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실 테죠. 아, 그날이 오면, 사랑하는 삼촌, 우리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거예요.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겪었던 우리의 슬픔을 돌아보며 따스한 미소를 짓게 될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우린 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믿어요.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_ <바냐 아저씨>, 더클래식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출처: 더클래식)


영화 속에서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후쿠는 결국 연출을 맡았던 <바냐 아저씨>에 주인공인 바냐로 출연하게 된다. 연극의 끝부분이 영화에 등장한다. 바냐로 분한 가후쿠가 책상에 앉아 괴로워하고 있다. 조카 소냐 역을 맡은 이유나가 뒤에서 바냐를 다정히 감싼 채 그의 눈앞에 두 손을 펼쳐 아주 꼼꼼하게 (수어로) 말한다. 

삼촌,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을 끝까지 살아가요…

바냐로 분장한 가후쿠는 바냐가 아니라 가후쿠 자신이 되어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관객석에서는 미사키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화를 떠올린다.
예술과의 대화.

내가 무너졌을 때 일으켜준 책과, 내가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게 도와준 음악을 생각한다.
예술과 대화할 때, 예술과 나, 우리 둘은 차 안에 있다. 나는 아스팔트에 감탄하면서 운전을 하고, 우리는 꼭 필요한 침묵 속에 있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