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션 '요조'의 청춘 에세이: 반짝반짝, 우리들의 백스테이지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읽고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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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이자 행성과학자인 심채경 작가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읽었다. 읽기 전에 작은 메모지를 준비했다.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 작년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어떤 과학책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우주의 비밀>, 지인은 이 책을 나에게 선물하면서 자신이 고등학생 때 읽었던 과학책이라고 했다. 아주 쉽고 재미있으므로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몇 장을 읽자마자 그 말이 (내게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튼 과학자들, 그리고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들...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썼다는 과학 교양서 속 그들의 선심을 나는 한결같이 미워한다. ‘아시모프의 글은 재미있으면서도 과학의 원리와 발견과정을 초등학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쉽게 설명한다는 특징이 있다’고 <우주의 비밀> 뒤표지에 적혀있다. 초등학생도, 초등학생도라니, 정말 너무하는군... 말할 수 없이 착잡해진 마음으로 초등학생만도 못한 것이 되어버린 나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이면지 한 장을 챙겼다. 어려운 책을 읽을 때마다 지도를 그리듯 종이에 메모하는 버릇이 있다. 중간에 길을 잃거나 중요한 이정표를 까먹지 않기 위해 내가 온 길과 기억해야 할 단어들을 적어두는 것이다. 읽고 있는 페이지에 이면지를 끼워놓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을 하나하나 적어가며 읽었다. 

그렇게라도 그 책을 더듬더듬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어려웠지만 분명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자와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밉지만 싫어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주의 언어는 뼛속까지 문과생인 나 같은 사람에게 어려워서 문제지 아름다운 영역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이면지 위에는 내 진한 문학적 감수성의 시선에 새로이 발견된 문장들로 가득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명왕성에는 3개의 위성이 있다’는 문장을 옮겨 적어놓고는 그 옆에 ‘이름을 잃은 왜소행성에게 그래도 세 벗이 있다니... 안심이 된다...'라고 덧붙이는. 내가 초등학생들보다 과학적 이해력은 달릴지언정 그들은 결코 나와 같은 감수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해본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출처: 문학동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라는 책을 두고 그때를 떠올리면서 아마 이번에도 따로 적을 것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당한 메모지를 책 옆에 두고 읽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끝까지 읽으면서 조금도 활용하지 않았다. 마치 나 같은 사람을 애초 염두에 두고 써 내려간 것처럼, 그 책은 어렵지도 않으면서 너무나 자주 아름다워서 일일이 메모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천문학자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아무것도 없다. 오랫동안 별을 무서워하며 살았던 터라 하루종일 밤하늘을 바라보는 천문학자의 모습을 진지하게 상상해본 적도 거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천문학자에 대한 정보는 토드 로즈의 책 <평균의 종말>에 잠깐 등장한 문장이 전부이다. 그 책에 의하면 지금 우리 인류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평균이라는 개념이 19세기 중반 천문학자들이 천체의 회전속도 측정에 쓴 평균법에서 왔다고 한다. 물론 나는 아직도 ‘회전속도 측정'이 무슨 말인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그냥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했을 뿐... 그 정도로 나는 천문학자에 대해 아는 것도, 궁금한 것도 없이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읽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났다.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책 13쪽)

내가 인간에게서 보는 가장 강력한 귀여움을 콕 집어 설명한 이 문장들을 보면서 나는 과학책 앞에 본능적으로 올렸던 가드를 내렸다. 그리고 저러한 귀여움에 이끌려 천문학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에 빠짐없이 감탄할 준비를 서둘러 마쳤다. 

별만큼 무수한 이 책의 재미 중 하나는 자신의 직업적 지식이 예술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상황에 대한 고백이었다. 예컨대 해 지는 풍경을 좋아하는 어린왕자가 자신의 자그마한 별에서 언제까지고 해지는 풍경을 보기 위해 단지 의자를 몇 발짝 뒤로 물려놓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계속 집중력을 잃는다. 그의 과학적 지식에 따르면 해 지는 광경을 계속 보기 위해서는 의자를 뒤로 물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의 집중력은 가쿠타 미쓰요의 <종이달> 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흔들린다. 평범하고 성실한 주인공이 난생처음 밤새 놀다 새벽에 나와 전철을 기다리면서 새벽 하늘에 뜬 초승달을 올려다보는 장면에서 그는 괴로워한다. 한국과 일본 인근에 이른 새벽 뜨는 달은 초승달이 아니라 그믐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원서까지 확인해보았건만 그믐달이라고 표기되어 있지 않아 울적한 그의 유일한 위안은 우리말 번역 표지의 그림에 초승달이 아니라 ‘그믐달'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천문학자의 모습은 영화를 볼 때의 한 뮤지션(나)과 몹시도 비슷하다.  그 뮤지션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배우가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면 필요 이상으로 악기의 세팅 정황을 살펴보거나, 연주나 노래가 라이브인지 싱크인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느라 줄거리는 안중에도 없을 때가 태반이다. 김영민 교수는 누군가 작품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맥락 속에서의 죽음에 집중해야지 그가 얼마나 숨을 잘 참으며 죽은 사람을 훌륭히 연기하고 있는지 같은 걸 봐선 안 된다고 어딘가에 썼다. 그걸 읽고 나서는 이런 내가 무척 한심하고 싫어졌다. 그래서 다음부터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다짐을 하고 나자 더 잘 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비긴 어게인>이나 <원스> 같은 음악영화에 엄청 크게 감동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유는 오로지 나, 나 때문이다. 

뮤지션과 천문학자의 거리는 아주 멀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꼭 닮은 데도 있구나 싶은 곳은 책 속에 얼마든지 더 있었다. 그가 어쩌다 보니 타이탄 전문가가 된 것(나도 어쩌다 보니 뮤지션이 되었다), 천문학자들이 정작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별을 관측하는 날은 손에 꼽고 컴퓨터 속 관측 자료들과 씨름하는 날이 대부분이라는 점(나도 무대 위의 화려한 순간은 일 년에 몇 번 없다, 물론 인기가수는 다를 것이다), 과학자에게 연구라는 것은 당장의 월급과 생계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점(노래를 만드는 일 역시 자아실현 이전에 나의 생계 수단이다), 여성 우주인을 향한 공정하지 못한 상황에 공분하는 마음 같은 것(나 역시 여성 뮤지션을 향한 부당한 상황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내가 지금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는 것일까. 확실히 이 글을 쓰는 지금 무척 신이 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치 기대 없이 나간 모임에서 맘에 쏙 드는 천문학자를 만나 그의 ‘백스테이지’를 구석구석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다. 

 

몇 년 전, 연극배우인 친구의 공연에 놀러 갔다가 공연 전 빈 무대에 올라간 적이 있다. 아무 관객도 없는 빈 무대와 그 너머 백스테이지를 구경하면서 나는 심장이 터져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정작 친구는 그런 나를 재미있어했다. 자신에게 이 백스테이지는 지겹도록 매일 같이 보는 아무것도 아닌 풍경일 테니까.

자기 직업의 ‘백스테이지'라는 것은 무엇보다 익숙하고 편한 만큼, 대단할 것 없다고 여겨질 뿐 아니라 실망하게 될 때도 잦은 공간 같다. 그 안에서는 남들은 모르는 치사하고 더러운 꼴도 빈번할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이 일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라는 말로 시작하는 자기 직업의 어두운 백스테이지에 지쳐 집으로 돌아온 날에는 여기서 벗어나 다른 일을 하는 나를 도망하듯 꿈꾸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의 백스테이지를 엿보면 대체로 기분이 나아진다. 남의 고생을 보고 자신의 현재를 위안 삼는 그런 심보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같은 물살을 탄 동료를 만난 느낌을 받는 것이다. 하고 있는 일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속에는 똑같이 녹록지 않은 고충이 있고, 그러다 얻는 보람도 있고, 그렇게 왔다 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우리’를 본다.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we)’라고 칭한다. (중략)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265-266쪽)

아주아주 거대한 연결감을 체화하고 있는 사람의 책을 읽어서인지, 나 역시 심채경 작가와 ‘우리’로 묶이는 사이라는 사실에 행복해지는 밤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같은 성을 가져다 쓰는 직업인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둘 다 성(星)을 보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