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션 ‘요조’의 청춘 에세이: 우리는 걷는다 칠순까지 가던 길을 계속 간다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올해 4월 1일 만우절에는 저녁에 공연을 보러 갔다. 서울 마포구의 한 클럽, 네스트나다에서 열린 공연이었다. 타이틀은 <누군가의 칠순잔치>. 티켓을 확인하는 직원분은 곱게 한복을 입고 있었다. 알콜스왑으로 핸드폰을 닦게 하고 몸에도 소독제를 뿌려주셔서 한 바퀴를 뱅글 돌면서 보니 공연장 한쪽에 칠순잔치를 축하하는 화환이 보였다. 내 다회용 마스크를 보시곤 KF94 마스크를 주시며 이것으로 교체를 해달라고 부탁하시면서 뭔가를 손에 더 쥐여주시는데, 보니까 백설기 떡과 기념 수건이었다. 내 천가방은 칠순잔치적 풍요로 금세 불룩해졌다.

지난 2월 네스트나다에서는 공연 시작 30분전, 공연이 취소되는 일이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두 번씩이나 미뤄진 끝에 다시 추진하는 공연이었다고 한다. 분명히 사전에 마포구청에 공연 허가를 받았음에도 당일 공연장에 찾아온 마포구청 담당자들은 방역지침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일방적인 해산을 요구했다. 오랜만의 공연에 열심히 준비했을 뮤지션들과 한껏 기대를 품고 찾아와 주었을 관객들의 허탈한 마음은 이후 한 언론과 인터뷰한 마포구청 관계자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한 차례 더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이 공연장이다. 일반음식점에서 하는 칠순잔치 같은 건 코로나19 전에야 그냥 넘어갔던 거지, 코로나19 이후에는 당연히 안 되는 것 아니겠는가.”

<누군가의 칠순잔치> 무대 위에는 ‘세종문화회관이 아니라 죄송합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누군가의 말실수가 불러온 쓸쓸한 풍자 공연을 앞두고 마냥 웃을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분위기는 시종일관 발랄했다. 한 밴드의 순서가 끝나고 다음 밴드가 준비하는 동안에는 ‘내 나이가 어때서’ 가 흘러나왔고, 한복을 곱게 입으셨던 직원분께서 그사이 마이크와 무대 곳곳을 민첩하게 소독했다. 
오해라고 나중에 마포구청 측은 해명하긴 했지만 그래도 ‘칠순잔치’라는 워딩은 너무나 잘못된 말이었다.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로 위계를 나누고, 클럽의 무대 위에서 노래(연주)하는 사람뿐 아니라 그 무대 자체를 위해 일하는 공연 관계자들, 그리고 그 무대를 보러 오는 관객들, 그러니까 그 씬(scene)의 문화를 향유하고 사랑하는 모두를 싸잡아 무시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서울에서 그 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홍대’라는 상징이 속한 마포구에서 그런 발언이 나왔다는 것은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덧붙여 애꿎은 전국의 칠순잔치 당사자와 관계자까지 황당하고 어이없게 할 만한 말이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칠순잔치와 클럽 공연의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나는 이것에 대해 조금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이자 노래를 듣는 관객이고, 또 칠순잔치는 아니지만 예순잔치에는 가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가 주인공이셨다. 빛이 잘 드는 넓다란 회관, 흰 전지가 덮인 긴 테이블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휘황한 잔칫상 너머로 할머니가 마치 왕처럼 가운데에 앉아계셨다. 잔뜩 모인 일가친척들이 먹고 마시고, 노래도 불렀다. 노래를 잘 부르는 우리 엄마는 또 불러 달라 성화를 하는 통에 거기서 새타령을 몇 번이나 불렀던지.


여럿이 모여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기도 하고… 얼핏 칠순잔치와 클럽 공연은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엔 큰 차이가 있다. 칠순잔치의 주인공은 딱 한 명이다. 바로 칠순을 맞은 사람. 모든 시간이 그 사람을 위해 준비된다. 그에게는 오로지 축하와 찬사와 덕담만 허락된다.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서 오직 낙관과 긍정만이 강요된 데에서 오는 피로감과 지루함이 슬그머니 보일지도 모른다. 

반면 클럽 공연장의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니다. 그 무대에 오르는 뮤지션 수만큼일까? 아니다. 그 공간을 찾아준 관객 수와 그 공간을 관리하는 스태프의 수까지 더해야 그 공간의 정확한 주인공 수가 된다. 즉 거기 있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무대가 존재하니까 무대 위에 오른 사람만 주인공이 되는 것 같지만 그는 그저 노래를 연주하고 부르는 역할을 맡은 주인공일 뿐, 그의 입과 손을 떠난 노래는 즉각 듣는 사람의 소유가 된다. 그 공간에서는 강요되는 정서가 없다. 모두가 주인공이므로 어떻게 느끼든 그것은 각자의 특권이다. 죽고 싶은 마음으로 뮤지션이 노래를 불러도, 듣는 사람은 그 노래를 들으며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뮤지션이 노래를 불러도, 듣는 사람은 그 노래를 들으며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춤을 추면서도 마음은 놀랍도록 차분하고,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활어처럼 날뛴다. 그 작은 공간 속에서, 우리 모두는 각각이 가진 몸 안, 끝없는 우주로 떠나, 살고 싶고 죽고 싶고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고 차라리 쓰레기가 되고 싶고 누군갈 미워하고 싶고 누군갈 사랑하고 뭔가 더 알아 나가고 싶은 주인공의 생기를 획득한다. 우리는 그렇게 음악 속에서 자아를 다진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도 발육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곳에서 음악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를 인간으로 키운다. 아무것도 아닌 밥 한 공기가 우리를 이만큼 키웠듯이.

 

▲김동식 작가의 소설집 <회색인간> (이미지 출처: 알라딘)

이런 시국에 무슨 공연이냐고 혀를 차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김동식 작가가 쓴 <회색인간> 이라고 하는 아주 짧은 소설이다. 그 소설 속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외부존재에 의해 고통받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할 만큼 현실은 고통스러워서 거기서 문화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외부존재가 시키는 대로 하루 종일 노동을 한다. 먹을 것이 없어 흙을 먹고 하다못해 노동의 도구인 곡괭이의 나무 자루를 씹어먹을 지경이 된다. 그런 곳에서는 사랑도, 우정도, 자비도, 대화도 없다. 그저 살아있는 송장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아까운 회색빛 인간들의 세상 속에서 어느 날 한 여인이 따귀를 맞는다. 한 사내가 때린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이 여자가 노래를 불렀소.“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노래를 부르다니, 미친 여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 여자는 다시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어디선가 돌이 날아왔다. 여자는 피를 흘리면서도 노래를 부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노래를 부르다 숨이 다하면 죽겠다는 듯 여자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누군가 조심스레 다가가 얼마 되지도 않는 먹을 것을 그녀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그래, 우리는 참, 인간이었지, 라는 자각이 만들어 낸 최초의 자비가 우아하게 반짝하는 순간이었다. 

공연의 마지막, 밴드 톰톰의 보컬 한상태 씨가 말했다. ‘칠순잔치’ 라는 워딩을 쓴 그 마포구청 관계자분 덕에 이런 공연도 즐겁게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아마 그분은 홍대 인디 문화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하셨을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끝맺었다. 내가 더 잘할게. 내가 더 열심히 해볼게. 라는 말은 언제나 잘잘못과 무관하게 더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숙연해진 마음으로 조용히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어슥한 밤길, 촉촉한 백설기를 조금씩 뜯어 먹으며 느릿느릿 올라가는 언덕길이 조금 심심하길래 나의 칠순잔치를 한 번 상상해보았다. 홍대 앞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제 ‘칠순잔치’는 지울 수 없는 글자가 되었으니, 이렇게 된 거, 몇십 년 뒤 우리들이 70세가 되는 시절에 정말 아름답고 신나는 칠순잔치들로 홍대 앞을 정신없이 만들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하나의 공연이 꼭 내 공연이 될 수 있기를, 그때까지 모두가 튼튼히 살아남아 주기를 바라며 공연장에서 집까지 오는 길 동안 내내 잊히지 않았던 노랫말 하나를 이곳에 두고 가겠다. 

우리는 걷는다
달리진 않는다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우리는 느리다
멈추진 않는다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간다

때로는 막힌다 
갇히진 않는다
가다 보면 길은 생겨난다

때로는 힘들다
죽지는 않는다
가다 보면 계속 가게 된다

-트리케라톱스, ‘ㄱㄴㄷ( I walk)’ 의 일부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