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lbert E. Kaplan, Publisher and Improbable Conductor, Dies at 74
- Jan. 6th 2016, New York Times -
지난 2016년 1월 6일자 뉴욕 타임즈에는 위와 같은 타이틀의 부고(訃告)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고인이 된 이 사람(Gilbert E. Kaplan)의 정체가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 직함을 겸하고 있다지만 간행물의 발행인(publisher)과 지휘자(conductor)라는 전혀 다른 두 역할을 겸하고 있는 모습은 선뜻 머리에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업역(業域)이 확연히 다를 뿐만 아니라 두 직업 모두 하나만 제대로 해내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고난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 기사의 주인공, 지난 2016년 향년 74세로 타계한 거대 경제지(紙) 발행인이자 지휘자였던 길버트 카플란(Gilbert E. Kaplan)입니다.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꿈과 도전 그리고 성취의 역사였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단 한 곡만 지휘하는 지휘자였다는 점에서 클래식 음악계의 기인(奇人)이자, 그 한 곡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깊이를 지녔던 거인(巨人)이었던 카플란의 생애를 여러분께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청년 카플란에 쏟아진 번갯불, 구스타프 말러
카플란은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문 듀크대에서 사회 조사를 공부했고, 뉴욕대 로스쿨을 졸업한 재원이었지요. 22살 때 얻는 첫 직장은 미국 증권거래소(ASE)였습니다. 이곳에서 이코노미스트로 일하며 금융 비즈니스 세계를 직접 접한 카플란은 투자자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뉴스와 정보를 편집하고 제공하는 일이 커다란 비즈니스 기회가 될 것임을 짐작하고, 1967년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Institutional Investor)’라는 투자자들을 위한 잡지를 창간합니다. 카플란이 모두가 선망하는 직장을 박차고 나와 출판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입니다. 그의 ‘첫 번째 도전’이었습니다.
▲카플란이 26세 때 창간한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 카플란은 발행인이자 편집인으로 활약하며 월스트리트의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주목받는다 (이미지 출처: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 링크드인)
26세 청년이 창간한 이 잡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지금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양질의 정보에 목마른 투자자들의 니즈를 정확히 짚은 것입니다. 카플란은 이 잡지의 발행인이자 수석 편집자로 일하며 승승장구하다가 1984년 뉴욕 타임즈에 지분을 매각하며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합니다. 돈은 충분했지만 그렇다고 일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지분 매각 이후에도 수석 편집자 자리만큼은 유지하면서 글로벌 금융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여기까지만 살펴보아도 그가 보통 바쁜 사업가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도대체 지휘자로서의 삶은 언제 어떻게 시작했을까요? 아니 지휘자 일을 할 시간은 있었을까요? 그가 지휘자의 꿈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운명이었을 수도 있겠군요)
카플란이 24살이 되던, 아직 잡지를 창간하기 2년 전인 1965년 뉴욕의 유서 깊은 공연장 카네기 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와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교향곡 2번 ‘부활’>(Symphony No. 2 in c minor, ‘Resurrection’, 이하 ’부활’ 교향곡) 연주를 듣게 된 것입니다. 이름도 낯선 작곡가 ‘말러’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습니다.
“수만 볼트 번개가 내 몸을 관통해서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남들에겐 그저 작은 감동으로 끝난 연주였겠지만 카플란에게 이날의 연주는 그의 인생에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그의 가슴 속에 작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씨 하나를 켜 놓습니다. 그것은 조금은 허황되어 보이기도 하고 발칙해 보이기도 하는 하나의 ‘꿈’을 밝힌 불씨였습니다. 바로 자신이 직접 이 말러의 <부활 교향곡>을 지휘해 보겠노라는 ‘꿈’에 첫 불꽃이 켜진 것입니다. 그의 ‘두 번째 도전’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멀티 페르소나의 끝판왕이 되다
카플란은 허황된 이상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날의 경험을 가슴에 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본업에 매진합니다. 2년 뒤엔 창업을 했고, 사세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 그의 일상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집니다. 매 순간 거대한 부가 오가는 글로벌 금융, 투자정보를 다루는 잡지의 CEO이자 편집자였으니 그의 하루가 얼마나 바빴을까 쉬이 짐작됩니다. 그러나 카플란은 그 바쁜 와중에도 가슴 한 켠에 간직하고 있는 그 불씨를 꺼트리지 않았습니다.
사업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30대 후반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지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악기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몰랐습니다. 참고로 그가 지휘하리라고 꿈꿨던 <부활 교향곡>은 연주 시간이 1시간 20분이 넘는 달하는 대작(大作)인 데다, 20여 종의 관현악기와 4명의 남녀 성악 솔로이스트 거기에 1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혼성 합창단까지 함께 지휘해야 하는 고난도의 음악입니다. 지휘자는 이 수많은 악기(성악가, 합창단도 포함)의 세세한 소리 하나하나를 구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소리를 한 손에 틀어쥐고 지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프로 지휘자들에게도 말러 교향곡, 특히 2번 부활 교향곡은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스코어[교향곡 모든 악기의 악보가 실린 총보(總譜)]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아마추어가 겁 없이 도전했던 것이죠.
카플란이 이러한 어려움을 몰랐을 리 없겠지요. 그래서 본인 스스로 꽤 오랜 경력의 음악 애호가였음에도 음악의 기초이론과 밑바닥부터 차근히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음대 졸업생을 개인 교사로 고용해 틈틈이 음악 이론과 지휘에 대해 기초부터 공부했고, 한번 시작한 음악 공부는 거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낮에는 글로벌 금융지의 CEO이자 편집자로, 밤에는 음악도로 변신해 그렇게 무려 3년 동안 꿈을 향한 축적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가 그저 꿈만 꾸는 몽상가가 아니라 열정적인 실행력을 갖춘 진정한 도전가라는 것을 보여준 증거입니다.
여기 또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거대한 스케일과 독창적인 선율의 작품들로 ‘말러리안(Mahlerian, 말러 애호가)’이라는 용어가 탄생할 정도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휘자 정명훈은 “나는 말러를 지휘하기 위해 지휘자가 되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런 인기는 최근의 일이고,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말러는 몇몇 소수의 지휘자(생전 말러와 교분이 두터웠던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같은 명 지휘자들이 그 몇몇 소수의 지휘자에 속합니다)에 의해 연주될 뿐,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였습니다. 당연히 그의 음악에 관한 자료나 연구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카플란은 음악을 배우는 동시에 작곡가 말러를 ‘연구’하는 일에도 매진합니다. 자신의 부(富)를 동원해 전 세계를 뒤져 서고에서 잠자고 있던 말러와 관련된 희귀 자료들을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합니다. 초판 악보, 자필 메모와 편지까지 그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자료를 모으다 보니 어느새 카플란은 말러와 관련된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자료, 기록을 보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재단을 설립해 음악학자들과 희귀 자료를 공유하며 말러 연구에 매진하며,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말러 전문가가 되기에 이릅니다. 지휘하는 시늉만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차근차근 <부활 교향곡> 지휘라는 꿈에 다가섭니다.
마침내 지휘대에 올라 말러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말러의 교향곡을 연주하다
카플란이 처음 <부활 교향곡>을 지휘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월 스트리트 억만장자의 호사스런 취미생활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저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지휘를 할 수 있겠다’라는 자신이 들자 드디어 지휘대 위에 서게 됩니다. 1982년도의 일입니다. 장소는 뉴욕 필하모닉의 홈 그라운드이자 유서 깊은 공연장인 링컨 센터 에이버리 피셔 홀(Avery Fisher Hall, 현재는 피셔 가문 후원이 중단되면서 새로운 후원자의 이름을 딴 데이비드 게펜 홀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이었습니다. 지휘할 오케스트라는 18년 전 자신을 전율케 했던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였지요. 마침내 말러의 <부활 교향곡>을 지휘하겠다는 꿈을 이뤄낸 것입니다.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지휘자 데뷔 무대라고는 하나 오케스트라는 그가 돈을 대 동원했고 관객들도 그의 지인들이었습니다. 몇몇 유력 평론가가 공연장에 초대되긴 했지만, 리뷰를 언론에 쓰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 네, 첫 시작의 상당 부분은 그의 ‘부(富)’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의 재력이 없었다면 이루기 힘든 일이었겠죠.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가 아무리 억만장자라 할지라도 그저 돈으로만 이런 일을 성취해낼 수 있었을까? 악보도 제대로 볼 줄 몰랐던 음악 문외한이 연주 시간이 1시간 20분이 넘는 대편성 교향곡을 지휘해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와 노력과 열정이 필요했을지 저는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이것은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집념으로 이뤄낸 빛나는 성과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이런 진심이 통해서였을까요. 그 미약했던 시작의 평가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관객들은 그의 도전정신에 환호를 보냈고, 평론가들의 일부는 여전히 그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반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평론가도 있었습니다. (카플란은 후일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호의적인 리뷰를 언론에 기고했던 몇몇 평론가들 덕분에 큰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뉴욕의 각 언론에서는 이 억만장자의 연주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단숨에 ‘카플란’이란 이름을 음악계에 각인시킵니다. 이렇게 원래 한 번의 연주로 끝날 줄 알았던 그의 <부활 교향곡> 연주는 그렇게 30년 가까이 계속됩니다.
사실 그의 이중생활은 이때부터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그의 드라마 같은 스토리에 매료된 음악계 관계자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게 객원 지휘자로 초청받아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 카플란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부활 교향곡>만 지휘하겠다는 것. 스스로 아마추어 지휘자의 선을 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대신 자신의 주 전공(?)에만 올인하다 보니 <부활 교향곡> 지휘에 있어서만큼은 세계 정상급 지휘자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무대가 뉴욕에서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고, 미국에서 다시 전 세계로 넓어졌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지휘로 <부활 교향곡>을 연주한 오케스트라는 이탈리아 최고 명문 극장인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영국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독일의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와 베를린 도이치오퍼, 러시아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이스라엘 필하모닉 등 세계 일류 수준의 오케스트라들이었습니다.
▲길버트 카플란과 빈 필하모닉의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앨범. 메이저 레이블인 도이체 그라모폰 레이블로 출시된 이 음반은 카플란이 말러의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과 함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든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거기에 최신 레코딩 기술을 아낌없이 투자해 음질도 매우 뛰어나다.
그 중에서도 카플란 스스로에게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은 아마도 1996년 잘츠부르크 음악제(Salzburg Festival) 개막 연주의 지휘자로 초청받은 일일 것입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당대 최고의 대가들만 초청받는 클래식의 본고장 유럽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음악제인 데다가,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개막 연주를 담당하는 오케스트라가 그 옛날 생전 말러가 직접 지휘했었던 ‘말러의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Wiener Philharmoniker)이었기 때문입니다. 말러는 1897년부터 1907년까지 10년간 빈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 음악감독을 역임하며 소속 연주 단체인 빈 필하모닉을 지휘했습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빈 필하모닉(지금도 빈 필하모닉은 전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연주 단체로 유명합니다)이 일개 아마추어인 자신에게 지휘를 허락했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평생 동경해왔던 작곡가 말러가 지휘했었던 오케스트라를, 이제 카플란 자신이 지휘하게 된 그 순간, 포디움에 올라 지휘봉을 움직였을 때 벅차오르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 청년의 무모해 보였던 도전이 마침내 결실을 이뤄낸 것입니다.
두 가지 부끄러움 앞에서
카플란은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2005년 성남아트센터 개관 연주에 초청받은 카플란은 연주 전날 있었던 강연회에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새로운 도전 앞에선 누구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겠습니다만 도전에 대한 그의 담대한 태도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저는 두 가지 부끄러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가 남들 앞에서 지휘를 했을 때 당할 부끄러움이요, 나머지 하나는 제가 지휘를 하지 않았을 때, 두고두고 제 자신이 후회하게 될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저는 전자를 택했을 뿐입니다.”
▲오케스트라와 리허설 중인 길버트 카플란. 그는 모든 꿈꾸는 자들의 귀감이자 아이콘이다. (이미지 출처: The Listener’s Club)
우리는 누구나 가슴 속에 꿈 하나씩은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 꿈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느라 또 때로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 앞에서 돌아서기 때문일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꿈을 이룬다는 것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서야 하고, 거칠고 힘든 도전의 과정 그리고 실수와 실패가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합니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지레 부끄러워하지 않는 담대한 용기와 도전 정신이 있다면 꿈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카플란이 마주했던 것과 같은 두 가지 부끄러움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당당히 전자를 택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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