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인이 읽어주는 클래식 음악: 병마에서 회복된 자가 신께 바치는 감사의 노래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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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저에게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어딘지 모르게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세계 위인전 책 표지의 잔뜩 인상을 찌푸린 초상화가 그랬고, -흔히 ‘운명’이라고 부르지만 베토벤은 그런 타이틀을 지은 적 없는- 교향곡 5번 1악장 첫 악절의 셋 잇단 음표들의 포효가 그랬습니다. (저는 이 음악을 여섯 살 적 옆집 아주머니네 놀러 갔다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전축’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천지개벽하는 천둥소리에 놀라 엉엉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고 보니 후세의 사람들은 이 악성(樂聖)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미간을 찌푸리고 두 눈을 부라린 근엄하고 심각한 모습만이 기록으로 역사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그의 인생은 고달팠습니다. 인생의 상당 부분을 부모의 학대, 가난, 장애, 병마와 싸우며 보냈습니다. 창작의 고통은 차라리 ‘덤’이었지요. 웃음 지을 여유조차 없었던 이 예술가가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전 인류에 유산으로 남길 수 있었다는 점이 신기하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현세의 인류가 누리는 베토벤 음악의 아름다움은, 어쩌면 상당 부분 그의 고통에 빚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옛 서독의 수도이자 베토벤 탄생지인 본(Bonn)의 한 광장에 설치된 베토벤 입상 설치미술. 1770년 베토벤은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궁정음악가를 지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이미지 출처: Pixabay)

2020년 올해는 이런 베토벤(1770년생)이 태어난 지 250주년 되는 해입니다. 클래식 음악계는 이 특별한 해를 기념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수많은 이벤트를 준비해 왔습니다. 피아니스트들은 그의 소나타 전곡 연주회를 기획하기도 했고, 세계 각지의 오케스트라는 9개의 교향곡 전곡 연주를 위해 오래전부터 피땀 어린 연습과 리허설을 반복해 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20년은 인류사에 ‘베토벤의 해’가 아닌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해’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공연장은 일제히 셧다운 되었고, 음악이 울려 퍼지고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있어야 할 공연장엔 정적만이 감돌 뿐입니다. 사회, 경제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 전 지구적 사태는 문화예술계에도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음악가들에게 텅 빈 객석은 상실감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다고 빈 객석을 향해 손 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는 일. 디지털이 그들과 관객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시작합니다. 

클래식 레이블 도이체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은 지난 3월 28일, 세계 피아노의 날(피아노 건반이 88개인 것에 착안, 그 해의 88번째 날을 피아노의 날로 지정)을 맞아 레이블 전속 피아니스트들의 릴레이 연주를 유튜브 채널과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으로 들려준 바 있습니다. 여기엔 루돌프 부흐빈더, 마리아 조앙 피레스 등의 노(老) 거장과 더불어 2019년 올해의 음반상을 수상한 아이슬란드의 비킹구르 올라프손, 한국의 조성진 등 같은 이 시대 라이징스타들도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공연장이 아닌 출연한 피아니스트들의 자택에서 연주가 진행되었다는 사실. 덕분에 좀처럼 보기 힘든 거장들의 자가(自家) 피아노 연주를 듣는 호사를 덤으로 누릴 수 있었습니다. 


▲도이체 그라모폰은 <2020 세계 피아노의 날>을 맞아 세계 최정상급 피아니스트들의 자택에 방송 장비를 설치해 전세계에 그들의 연주를 생중계했다. 이 콘텐츠 검색을 위한 해시태그는 #World Piano Day와 #StayAtHome 이었다.

세계 최고의 악단 중 하나인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Berliner Philharmoniker), 그리고 음악의 성지라 불리는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의 대표주자 빈 국립오페라(Wien Staatsoper)는 그들의 디지털 스트리밍 플랫폼을 무료로 개방했습니다. 당초 연 수십만 원을 결제해야 접근할 수 있는 고가의 콘텐츠를 바이러스를 피해 ‘집콕’하고 있을 전 세계인들을 위해 한시적으로 무제한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이들 플랫폼의 영상 콘텐츠는 HD급 화질에 Hi-Res 무손실 음원 인증까지 받은 고품질 콘텐츠로 실제 콘서트 현장의 생생함을 안방으로 전달합니다. 

한국 음악계도 여기에 뒤질세라 무관중 콘서트를 잇달아 무대에 올리고 있습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온라인 스테이지’라는 이름의 무관중 라이브 연주를 기획, 유튜브 채널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생중계한 바 있는데요. 지난 3월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에로이카(Eroica, 영웅)’, 그리고 얼마 전엔 교향곡 5번까지 빼어난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공연장이었던 잠실 롯데 콘서트홀의 객석은 총 1,800여 석 가량.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디지털 중계를 통해 베토벤 선율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세 번째 무관중 콘서트 온라인 중계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이었다. 시향의 부지휘자 윌슨 응(Wilson Ng)과 단원들은 국민들에게 ‘베토벤 정신’을 선물하고자 이 콘서트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음악은 잠시 동안 모든 걱정을 잊게 한다.” 

바로크 시대 영국의 작곡가 헨리 퍼셀(Henry Purcell)의 이야기입니다. 지구촌이 지독한 병마와 싸우고 있는 가운데 전 세계 음악가들의 선의로 만들어진 디지털 콘서트 행렬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북대서양 겨울 바다 한가운데에 침몰하고 있던 타이타닉 호 승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던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악기를 놓지 않았던 현악 4중주단의 연주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음악은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백신이 됩니다. 오늘날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긴 터널 속을 헤매는 와중에도 디지털을 통해 우리와 연결된 음악가들의 정성 어린 연주는 잠시나마 걱정과 시름을 잊고, 일상의 회복을 차분히 기다릴 수 있는 에너지와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다시 베토벤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베토벤 역시 지금으로부터 약 195년 전 어느 날, 사선(死線)을 위태롭게 오가는 큰 병에 시달립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피를 토’할 정도로 꽤 위중한 상황이었습니다. 반평생을 온전치 못한 몸과 싸워온 베토벤이었지만 그의 나이도 당시엔 이미 노년으로 접어들었기에 더더욱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으리라 생각됩니다. 정성 어린 치료와 간호로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 극적으로 회복한 베토벤의 가슴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감정은 ‘감사’였습니다. 

그렇게 1825년 한여름에 <현악 4중주 제15번 a단조 작품번호(Op.) 132>가 탄생합니다. ‘인류가 도달한 음악 최고의 경지’라는 찬사를 받는 후기 현악 4중주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요. 특히, 병환에서 회복된 직후 작곡하기 시작한 ‘제3악장 몰토 아디지오’엔 이런 긴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병마에서 회복된 자가 신께 드리는 거룩한 감사의 노래, 뤼디아 선법으로 Heiliger Dankgesang eines Genesenen an die Gottheit, in der lydischen Tonart >

베토벤에게 알려지지 않는 여성 필사 조수가 있었다는 픽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카핑 베토벤(2006)>의 종반부엔 이 현악 사중주 제15번 3악장을 작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극 중 베토벤(에드 해리스 분)은 아직 회복 중인 듯 침대에 누워 구두로 머릿속 악상을 악보 필사 보조 안나 홀츠(다이앤 크루거 분)에게 그리도록 지시합니다. 참고로 베토벤은 이미 오래전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 만년의 걸작으로 평해지는 현악 사중주 제15번 3악장을 작곡하는 장면. 극 중 안나 홀츠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하다, 우연히 베토벤의 악보 필사를 맡으며 그와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존재로 그려진다. 흥미롭지만 애석하게도 완전한 허구다.

곡은 느리지만 장엄한 찬송가(hymn)풍의 제 1주제 선율로 시작됩니다. 악보 첫 마디에 기재된 지시어 ‘소토 보체(sotto voce)’에 따라 조심스레 속삭이듯 연주되지요. 이어 제 2주제가 ‘새로운 힘을 느끼면서(Neue Kraft fühlend)’라는 지시와 함께 등장하며, 이때 2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그리고 첼로가 서로 대결하듯 힘차게 캐논(돌림노래) 풍의 연주를 이어갑니다. 그리곤 제 1주제와 제 2주제가 한 번씩 변주되다 마지막으로 제 1주제가 다시 한번 변주되며 악장이 마무리됩니다. 마지막 제 1주제의 변주가 시작되는 지점엔 ‘가장 깊은 감정을 가지고(Mit innigster Empfindung)’라는 베토벤의 지시가 적혀 있습니다. 

베토벤은 이 악장을 가리켜 ‘신께서 일을 끝낼 때까지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노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곡의 감동을 감히 몇 줄의 글로 다 표현하긴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 베토벤의 독백으로 느낌의 일부분이나마 전달하고자 합니다.

“제 1 바이올린이 신을 갈구하면 신께서 대답하신다. 구름이 열리고 사랑의 손길이 내려와 하늘로 들어 올린다. 첼로는 계속 땅에, 다른 소리들은 계속 떠 있고 그 순간 인간은 영원 속에 거하게 된다. 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도 사라지고. 인간을 들어 올린 손길은 얼굴을 어루만져 신의 형상으로 빚어낸다. 그리고 신과 하나가 된다. 평화 속에 존재하고 마침내 자유가 된다.”


▲현악기 연주자들에게 베토벤 후기 현악 사중주는 ‘성서’로 불릴 정도의 높은 위상을 지닌다. 당대 가장 뛰어난 현악 4중주단으로 불렸던 알반 베르크 4중주단(Alban Berg String Quartet)의 제15번 3악장 연주. 조금 오래된 영상이긴 하지만 연주의 완성도는 2020년인 아직까지도 견줄만한 영상이 없다.

처음 대수롭지 않게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이제 다섯 달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아직은 끝이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늘 그래왔듯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바로 그날, 그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며, 그리고 일상이 내 곁에 있음을 감사하며 조용히 우리의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로 이 음악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몰토 아다지오(molto adagio, 매우 느리게). 소토 보체(sotto voce, 매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