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둥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움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왼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중고등학교시절을 제대로 보낸 남학생이라면 아니 제대로 보내지 않은 남학생들 조차도 김유정의 동백꽃은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듯싶다. 따지고 보면 대단할 것도 없는 시골 계집아이 점순이의 밀당에 가슴이 그리 콩닥 콩닥 뛰었던 것은 그 나이 또래들만의 감수성 탓도 있었겠지만, 정신줄 모조리 놓고 감정이입 하게 만든 김유정의 신기에 가까운 글솜씨 때문이리라. 뭔 글을 그리 맛깔지게 쓰는지 산비탈을 구르는 남녀의 모습이 그러고도 몇 날 며칠, 내 머리 위로 지나다녔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인지 동백꽃은 괜히 쑥스럽다. 그러다 더 쑥스러웠던 일은 친구와 티격태격하다 김유정의 동백꽃이 내가 생각하던 남녘의 동백꽃, 동백아가씨의 그 동백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만 머쓱해졌는데, 이 자리를 빌어 그 당시 괜히 마음 상했을 붉은 동백꽃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사실 소설에 나온 대로 김유정의 동백꽃은 노랗다. 그리고 그 꽃은 생강나무라는 것이 많은 분들의 가르침이다. 강원도 지방에선 생강나무를 산동백 혹은 동백나무로 부른다는 것이니 (김유정은 아시다시피 춘천 사람이다.) 소설의 동백꽃은 이른 봄, 산길 걷다 보면 노란 꽃이 예쁘고-산수유로 착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잎에서 알싸한 생강 향이 나는 그 생강나무였던 것이다.
집 뒷산에 생강나무 꽃이 진지는 이미 한참 전이다. 임무를 다한 꽃은 또 다른 꽃으로 계속 봄을 릴레이 한다. 며칠 전에는 불현듯 겹벚꽃이 떠 오른 아내의 손에 이끌려 서산의 개심사에 다녀왔다. 홑벚꽃은 4월 초면 지지만 겹벚꽃은 지금이 한창이다. 사실 꽃이 피는 지, 지는 지도 모르고 살았던 지라 일부러 시간을 내어 꽃 마중을 간다는 것이 나로서는 낯선 일이다. (언제부턴가 꽃이 좋아졌는데,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젊었을 때는 눈이 오면 좋았는데 나이가 드니 꽃이 피면 좋더라’가 요즘 내가 자주 하는 말일 따름이다. 홑벚꽃과 달리 겹벚꽃은 큼직큼직 탐스럽고 만지면 복슬복슬한 새끼강아지 털처럼 보드라운 꽃들이 다투지도 않고 서로 뭉쳐 무심히 아름답다. 그 고운 꽃잎 위로 저녁 빛이 내려 앉고, 꽃 길 사이로 한줄기 바람이 지나간다. 저만치 꽃잎들이 연분홍 눈이 되어 흩날린다. 유행가 가사가 아니더라도 봄날은 가고 있다.
봄은 탄생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많은 식물들에겐 생식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들이 꽃을 피우는 이유는 다음 생을 기약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갈구하기 위함이다. 사실 꽃은 그런 그들의 생식기이다.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이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을 부르는 너무나도 처절한 몸부림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무게를 지기 전의 사랑은 그렇게 아름다웠으리라. 오로지 사랑만 생각하는 사랑, 그래서 모든 꽃은 아름답고 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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