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겠지만, 어떤 한 단어가 모든 사람들에게 등가의 감정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청계천을 지나가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너무 많이 변해버려 더 이상 청계천이 청계천 같아 보이지 않아서이기도 하거니와, 멀리 다리 밑에서 놀고 있는 저 아이들에게 청계천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청계천을 갖고 살 것이라는 불길한(?) 확신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의 청계천이 되기 이전의 청계천은 눈물이기도 하고 상실이기도 하고 상처이기도 하고 땀이기도 하고 생존이기도 하고 가난의 때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꿈이기도 하다.
우리 나이의 한국인들(러시아를 소련이라 부르고 중국을 중공이라고 부르고 때마다 회충약을 규칙적으로 먹으며 자란)에게 유년의 기억은 대부분이 가난의 기억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는 우리 집이 가난했다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주위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 혹은 더 가난했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내가 다니던 달동네 초등학교(국민학교라는 명사가 더 익숙하긴 하지만)에서 나는 그나마 도시락을 싸갔던 부잣집 아이들 그룹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자랑하자면, 당시 우리는 집까지 소유하고 있었으니 나의 초등학교 생활은 그 얼마나 늠름하였겠는가. 집의 규모는 그 골목에선 중간쯤 되는 규모였는데 작은 세수 터가 있는 마당과 방 두 개가 마루를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었는데 아버님 말로는 우리 집이 여섯 평 남짓 될 거라고 했다.(그게 얼마나 작은 집이었는가는 조금 더 커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것도 방 하나를 어떤 자매에게 전세를 놓고 우리 네 식구는 그렇게 오붓하게 한방에서 지내던 시절이었다. 중학생이 돼서야 건넌방을 내방으로 쓸 수 있었으니 그 기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었겠는가.
수십 개의 골목길이 미로처럼 연결된 아현동 언덕 위의 달동네는 나와 친구들에게 세계의 전부였다. 본격적으로 바깥세상을 처음 구경하게 된 것은 중학교에 가서였다. 이른바 공동학군의 중학교에는 여러 지역의 아이들이 입학했는데, 나처럼 달동네 출신의 아이들부터 한강 근처의 맨션아파트 아이들까지 섞여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키가 멀대처럼 크고 허여멀겋게 생긴 어떤 친구로부터 식사초대를 받았는데, 그 친구 덕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파트라는 데를 구경하게 되었고, 수세식 화장실을 보게 되었고, 제너럴 일렉트릭 냉장고를 구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어머니가 하얀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냉장고에서 꺼내 따라주었는데, 우유는 이렇게 냉장고 안에 그것도 하얀 유리병 안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한 집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처음 알게 되었다. 그 후 그 친구는 이번엔 자기를 우리 집-나의 세계-에 초대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의 대답은 늘 미적지근하였고 끝내 그 친구는 초대받지 못했다. 사실 초대 받고 말고가 어디 있겠는가. 그건 달동네의 용어가 아니다. 친구 집이면 그냥 친구가 있든 없든 들락날락하는 거지. 어쨌든 나의 문화적 충격은 그 친구를 감내하지 못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건 너무 고상한 화법이고, 쪽 팔리고 창피해서 도저히 우리 집에 데려가지를 못했다. 그럴 나이였지만 아버지에게는 늘 그 일이 죄송스러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 이야기를 하며 술 한잔 나눴어야 했다)
사실 아버지는 평생을 고지식하고 가난한 남자로 살았다. 살갑지도 않고 엄격했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결국은 내가 아버지가 되어서- 나는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 가난한 살림에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월급날 즈음이었을 것이다) 꼭 나를 데리고 청계천을 갔다. 새 책을 사 줄 형편이 못되니 청계천 헌책방을 데려갔는데, 아버지와 함께 책들을 고르고 사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매달 청계천을 가는 일은 어느덧 우리 집의 리추얼이 되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 또래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책 읽기의 습관은 쓸데없이 조숙해지거나 가끔 학교생활을 등한히 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생각의 힘을 길러주었고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청계천은 아들에 대한 꿈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만큼의 사람이 되지는 못했지만, 아파트와 우유가 삶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해주셨음에 감사드린다. 가난한 삶보다 더 나쁜 삶은 노예의 삶이다. 나에게 청계천은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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