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08 : 자두 냉면 감자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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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 냉면 감자

 

Wisebell

 

이 현 종

대표 CD - Chief Creative Director / jjongcd@hsad.co.kr




‘집 주소 좀 날려라. 자두 좀 보내게’ 멋대가리 없는 P답게 문자도 참 멋대가리 없다. 백수 생활하며 지은 책에 제목 좀 달아 달라 하여 보내 줬더니 나름 고맙다고 보낸 문자다. 그래도 자판을 꾹꾹 눌러대는 P를 떠올리니 슬며시 미소가 돈다.‘ 자두’라는 단어에서는 나도 모르게 침이 고인다. 보드라운 육질하며 고 달콤새콤한 즙과 향이라니! 여름 자두는 천국이다. 나의 기억이 그렇다.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맛보면서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린다. 맛은 기억

을 부르고 기억은 맛을 챙긴다.


집에서 온 첫 편지에 눈물이 마를 새도 없이 6주간의 훈련은 거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각개전투와 유격만 마치면 무더위도 한풀 꺾일 것이다. 각개전투는 5주차 때 훈련으로 기억되는데, 교장이 꽤 멀어 논두렁 밭두렁을 수도 없이 지나쳤던 것 같다. 해는 점점 높아지고 땅도 달아올라, 숨은 턱 밑까지 차올랐다. 일사병 때문에 소금도 준비하고 간간히 휴식도 주어졌지만 훈련병이란 처지가 어찌 대우받을 몸이겠는가.‘ 돌격 앞으로!’를 반복하는 조교의 눈빛엔 인정사정이라곤 애초 가져본 적이 없어 보였다.

산중턱쯤 올라왔을 때에야 비로소 휴식다운 휴식이 주어졌다. 나무 그늘을 찾아 담배를 꺼내 물었을 때쯤이었을까…… 누군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자두였다. 발그레한 자두를 내밀며 Y조교는 턱짓을 했다. 여러 모로 형처럼 친밀하게 대해줬던 Y조교에게 나는 늘 어눌하고 불안한 존재였다. 빙그레 미소 짓는 Y조교를 바라보며 냉큼 한입 물어 제쳤다. 그 때의 그 자두 맛이란…. 지친 육신에 내린 단비였으니, 그 맛은 천국일 수밖에.

그런데 사실 그 이후에 먹은 자두들에서 이 만큼의 감격을 경험해본 적은 별로 없다(자두들한텐 왠지 미안하기도 하지만). 당연한 말이겠지만 모든 맛이란 그 맛과 맛을 둘러싼 조건들의 총합이기 때문일 것이다. 맛은 혀의 기억일 뿐 아니라 온몸의 기억이다. 그러기에 백석 시인의 거의 모든 시에 음식이 등장하는 것은 의당한 일일지도 모른다. 음식은 감각의 총화요 그리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 <국수>中


여기서 국수는 냉면인데, 평안도 정주 출신의 백석인지라 동치미 국에 냉면을 말아먹는 맛을 그리워함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음식만큼 감정을 동요시키고 이입시키는 메타포가 어디 있겠는가.

자두가 온 지 얼마 후에 후배 하나가 하지 감자를 거뒀다며 보내왔다. 호랑이만큼 무서운 여름이지만 그래도 여름이라야 먹을 수 있는 먹거리가 있으니 이 또한 즐거움 아니겠는가. 선선한 마음들이 고맙고 또 고맙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