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3-04 : 광고적으로 본 역사 인물 - 主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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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박 형 수 부국장 | 기획4팀
 hapark@lgad.lg.co.kr
로마 산헤드린공회에서 변호하는 바울
(왼쪽의 두손 든 이)
제임스 트위첼의 저서 <세상을 뒤흔든 20개의 광고>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장 31절)”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서울역 대합실에서 전도하는 사람의 어깨띠나 시골 버스정류장 등 어디선가 흔히 만날 수 있는 구절일 게다. 나 역시 교회에 관해서는 어릴 적 빵을 얻어 먹던 재미로 한두 번 갔던 것과, 군대시절 피곤한 졸병이 예수님을 보기보다는 부처와 같이 반개한 눈으로 오수를 보내던 기억 밖엔 없으나, 위의 구절만은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복 받은 나라가 틀림없어 보인다.
나 자신이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종교를 갖지 않은 이유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 보지도 않았지만, 철저한 외부자적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종교를 가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현실생활에 있어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더러는 하기 때문일 게다.

감히 광고인을 바울에 비유하나니...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인지), 믿고 있고(선호), 현대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리스도교(구교·신교 포함)를 광고적으로 보자면 “히트브랜드” 라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중심축은 당연히 ‘예수’일 것이며 컨셉트는 ‘사랑’이고 그들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서는 ‘성경’이지 않을까?
그런데 예수님을 광고적으로 논하기에는 나의 종교적 공부도 부족하고, 필화(筆禍)도 두려워진다. 오히려 우리와 같이 히트브랜드를 만들고자 죽을 고생을 하는 광고인에게는, 동지적 느낌이 드는 숨은 공로자 ‘바울’이 더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바울은 종교적 뼈대를 구축하고 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하였으며, 로마에까지 전도하고 순교한(네로황제에 의해서),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이며 로마의 시민권자였다.
예수가 생존 당시 유대의 율법 아래 공부한 바울은 혹세무민하는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처벌하는 총책임자였단다(지금도 이스라엘의 유대교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 그런 그가 예수를 만나고 180도로 변하여 유대교의 배신자로서, 예수의 충직한 사도로서의 길을 걸었다니, 그 드라마틱한 인생의 반전이란 나와 같은 광고인들도 많이 겪게 되는 일이 아닌가 비유된다. 오늘도 A라는 회사를 광고주로 모시고 열심히 경쟁사 B를 공격하다가, 내일은 B라는 경쟁사를 영입하여 어제의 광고주 A의 약점을 공격하는 게 그렇게 비유된다는 말이다.

그대는 차별화된 컨셉트로 초지일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도대체 무엇으로 바울을 설득하였을까? 아니 바울은 무슨 생각으로 예수를 따랐을까?
당시의 시대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역사와 이를 관통하는 사상 속에서 신의 존재 여부는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즉,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어서 무언가를 인식하고 또 정의하는 과정에서 신을 담보했던 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울만이 아니라 지금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유를 광고적으로 해석하면 다음 3가지로 압축시켜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육신의 행복이 아닌 영혼의 구원을 말했다는 점이다. 모두가 나를 믿으면 현세에서 등 따습고 배 부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할 때, 너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믿으면 죽어서 천당 간다고 했으니 다른 이들과 차원이 높고 차별화된 컨셉트를 가졌다는 점이다(아~ 역시 차별화).
둘째,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고 보편적 가치인 ‘사랑’을 키워드로 삼고 일관되게 지향했다는 점이다(아~ 역시 초지일관. 이는 알 리스도 ‘마케팅 불변의 법칙’에서 주장했다).
셋째, 극단적인 대비와 역경을 딛고 일어난 드라마가 있다는 점이다. 처녀의 몸을 빌어 태어나고,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했다는 다소 신화적 요소를 배제하더라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말 구유에서 태어나 같은 민족에게 핍박 받는 등 대중의 심리에 관심과 동요를 일으킬 만한 호소력이 컸다는 것이다(아~ hidden drama).
우리는 (광고)주님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예수와 바울의 언행을 광고적으로 보노라면 많은 유사점도 발견하게 된다. 예수가 그의 제자 베드로에게 “내일 닭이 울기 전 나를 배신한다”고 한 것에 비추어, 우리 또한 (광고)주님을 모시면서 긍정적인 면도 보지만 끊임없이 (광고)주님의 제품을 부정도 하고 개선할 점도 찾지 않는가?
작가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에는 기독교적 교리와 이상이 현실을 구원하지 못하는 모순점에서 주인공들의 방황이 나타난다. 쉽게 말해서 ‘예수 말씀’과 ‘빵’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에 다다른다면 실제로 사람들이 어떠한 것을 택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라는 이야기이다.
불경기가 지속되고 매출이 저조한데 브랜드광고, 이미지광고를 외치는, 예수님 말씀과 같은 광고인들의 소리가 광고주들에게는 어떻게 들리겠는가? 미친놈 아니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로 찍혀 다가올 경쟁 PT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 광고인들이 (광고)주님들을 부정한다기보다는 브랜드의 영원불멸한 생명력이라는 관점에서, 단기처방보다는 장기처방으로서의 예수님 말씀을 전할 뿐이니 관점의 차이를 이해해 주시기를 기원한다.
 
광고는 소비자의 메시아가 아닌지요?
광고가 “브랜드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대중들의 의식을 변화시켜 문화를 창출하는 과장된 진실”이라고 주장한 미 플로리다대학의 제임스 트위첼(James B. Twitchell)은 그의 저서에서 “광고를 통해 물건을 소비하는 것은 인간욕망의 해방이며 동시에 이 세상으로부터 구원”이라고 말한다.
사실 물건 자체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굳이 광고가 필요 없을 것이다. 가치 있는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삶의 중요한 충족이라면 광고는 중요한 위치를 점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식량과 피난처가 충족된 이후부터 문화적 욕망을 갈망해 왔고, 그 욕망을 광고가 채워주어야 하기 때문에 광고는 광고인들만의 문제에서 확장되어 소비자인 우리 모두의 메시아와도 같지 않을까?

그리스도교의 토대를 만든 바울에게 광고인으로서 애정을 느끼며, 우리의 메시아 (광고)主님은 어디 계신지 찾아보고 싶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