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트렌드를 읽다
소데카와 요시키
교토가쿠인대학 교육개발 센터 교수
게이오대학원 건강 매니지먼트 연구과 비상근강사
1963년 출생
1987년 덴츠 인사. 마케팅국, 덴츠 총연 부장
2005년 일본 내각부 경제사회종합연구소 정책기획조사관
2015년 4월 이후 현직
전문분야 : 가족연구, 세대론, 히트상품 분석, 행복지수연구 등
출 판 물 :< 크리에이티브 두뇌의 조작>(아사히신문사, 2007) / <선과 면의 사고>(다이와쇼 보우, 2008)
/ <행복 방정식>(야마다 마사히로 & 덴츠 팀해피니스 디스커버 21, 2009)
트렌드란 무엇인가
어떤 시기에 모든 이들이 열광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른 뒤에 생각해 보면‘ 왜 사람들이 그토록 빠져들었던 걸까’ 싶은 것들이 있다. 그러한 때에는 사회 전체가 일종의 열병에 걸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객관적인 판단력을 잃어버렸던 건 아닐까 싶다.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 당시 젊은 남성들은 대부분 프렐류드(Prelude)나 셀리카(Celica) 같은 스포티한 차량을 선호했지만, 지금은 아버지 소유의 가족용 에코카로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한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취향이나 욕망에 따라 상품을 선택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 분위기’라는 트렌드에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 면이 강하다.
‘트렌드’라고 하면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나 존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 같이 문명의 변화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트렌드도 존재하지만, 광고회사가 주목하는 것은 사실 수년에서 십여 년 정도 사이에 바뀌어버리는‘ 그 시대의 동향’, 즉 겉으로 나타나는 트렌드 자체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야말로 바로 시대를 움직이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1984년에 덴츠 소속의 유명 플래너 후지오카 와카오(1927~2015)가 <대중이여 안녕히>라는 책에서“ 모두가 같은 것을 추구하는 대중(大衆)이 붕괴하고 같은 취향을 지닌 다수의 작은 그룹인‘ 소중(小衆)’으로 분열해 존재하는 사회가 됐다”고 설파한 바 있다. 비슷한 시기인 1985년에 하쿠호도의 생활종합연구소는‘ 분중(分衆)’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현상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후지오카가 ‘대중이 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계기는 혼다에서 출시한 시티(City)라는 소형차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게 됐을 때라고 한다. 그 전까지는 공력저항을 낮춘 유선형의 샤프한 디자인의 차량이 인기를 끌었지만, 시티는 차량의 전장이 짧고 높이가 낮은 짧고 뭉툭한 사각형 디자인의 차량이었다. 이를 오히려‘ 귀엽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는 것을 보고 새로운 트렌드가 태동했음을 느꼈다는 것이다.
히트상품은 돈이 되지 않는다!?
덴츠에서는 1985년부터 매년 연말에‘ 히트상품 리포트’(최근에는‘ 주목할 만한 화제의 리포트’)를 작성해 발표하고 있다. 그 해에 히트했거나 화제를 불러 모았던 상품으로부터‘ 시대의 흐름’을 캐치해 키워드로 발표하는 것이 다. 이러한 히트상품 랭킹을 본 기업 관계자들은‘ 그럼 다음엔 뭐가 히트를 치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곤 하는데,‘ 히트상품 리포트’의 취지는 다음 히트상품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무엇이 히트할지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갑자기 어떤 상품이 히트하게 되면 재고가 부족해져 투자를 통해 생산량을 늘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생산이 가능해질 때까지는 수개월 이상 소요되고, 시장에 다시 상품이 풀릴 때쯤이면 변덕스러운 소비자의 마음은 어느새 식어버려 기업은 대량의 재고를 떠안게 되기도 한다.
또한 히트상품은 생각만큼 이익을 거두지 못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과거 휴대형 육성 게임기‘ 다마고치’를 출시해 대히트를 거둔 기업의 경우 재고가 부족해 서둘러 대량 증산했지만, 상품이 시장에 풀렸을 때는 이미 다마고치 붐이 식어버려 결국 수 억 엔의 적자를 보기도 했다.
‘시대의 트렌드를 아는 것’의 메리트
히트상품을 분석하는 것은 다음 히트상품을 발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히트상품의 이면에 있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트렌드를 발견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트렌드를 캐치할 수 있다면 세상을‘ 스토리’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음에 어떤 시대가 다가올지 예측 가능해지고, 그 대응책을 강구할 수 있다. 그러한 예측이 현실화되면 트렌드를 올바로 읽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앞으로 펼쳐질 스토리를 먼저 읽어낼 수 있게 된다. 혹시 예측이 틀렸다 해도 왜 예측대로 진행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수정함으로써 보다 정확한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계획성 없이 당장에 일어나는 일만을 보고 그때그때 대책을 강구하는 기업과는 천지차이가 나는 것이다.
시대의 트렌드를 발견하는 방법(제 1단계)
상품이나 트렌드 관련 정보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대다수의 기업들이 앞날을 읽어내기 위해 광고회사에 의견을 구하는 이유는 기업 내에서는 트렌드를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조사를 통해 파악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시계열적인 데이터 또는 빅데이터로도 트렌드에 관한 효율적인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시대의 트렌드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필자가 선호하는 방법은 다마대학의 호시노 카츠미 명예교수가 고안한 프레임을 바탕으로 하는데,‘ 기호론’이라는 철학적 방법이 근저에 깔려 있다. 기호론은 1980년 대 유행한 이후 지금도 마케팅 분야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기호론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상품이나 현상들은‘ 겉보기’와‘ 의미’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보고 있다<표 1>.
나이키 스니커즈 같은 경우‘ 컬러 센스가 좋고 쿠션재가 시각적으로 보이는 형태로 삽입돼 있는 참신한 슈즈’라는 겉모습이 있고,‘ 일류 운동선수가 된 듯한 느낌으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의미가 존재하는데, 이 둘을 끌어내 양쪽 모두를 납득했을 때 나이키 스니커즈가 하나의‘ 기호’가 되어 구입으로 이어진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를 히트상품에 적용시켜 보면 어떤 히트상품이 어느 특정 시대에 히트하는 것은 그 상품의 기능적 가치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상품이 그 시대에서 지니는 ‘의미’가 평가 받았기 때문에 ‘기호’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공감해 히트상품이 됐다고 판단한다. 결국 히트상품 자체의 소재나 기능이 아니라 히트상품의 이면에 있는‘ 의미’에 주목하는 것이다.
트렌드 발견 사례
일본의 경우 약 10년 전부터 몇 가지 특징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바로‘ 고기 열풍’이다. 웰빙의 영향으로 고기보다 채소를 먹는 사람들이 늘어난 가운데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칼로리가 높은 야키니쿠를 즐기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고기의 다양한 부위를 직접 먹으며 비교해보기도 하고, 각지에서 펼쳐지는‘ 고기 페스티벌(전국의 유명한 고기요리점이 대형 공원에 집결해 포장마차 형식으로 요리를 제공하는 이벤트)’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넘쳐나고 있다.
두 번째는 맥주업계의 변화다. 예전에는 불황 속에서 가격이 저렴한 발포주나 제 3맥주의 판매가 늘었었지만, 최근에는 가격이 비싼 프리미엄 맥주의 판매량이 증가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콘포타주맛 아이스크림을 꼽을 수 있다. 아카키유업의 스테디셀러 아이스크림 ‘가리가리군’의 새로운 맛으로, ‘가리가리군 리치 콘포타주맛’이라는 프리미엄 상품을 출시한 결과 수십 엔(한화 수백 원) 가량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바로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세 가지 현상의 이면에 내재된 공통된 트렌드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바로‘ 진한 맛’ 붐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표 2>. 이러한 트렌드는 초기의 개별 상품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수년 후 이것이 표면상에 드러나 모든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진한 맛’을 찾게 된다. 기획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트렌드가 표면상에 드러났을 때 캐치하는 건 이미 늦은 것이기 때문에 징후가 보이는 시점에서 먼저 캐치해 대응해야 할 것이다<표 3>.
트렌드의 이유 찾기(제 2단계)
‘시대의 흐름’이 변화했다는 걸 캐치하는 것이 제 1단계였다면, 여기서 더욱 생각을 발전시켜 왜 그러한 흐름으로 바뀐 것인지를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트렌드는 마케터가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한 맛’ 붐이 일어난 이유는 웰빙 붐이 사그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몸에 좋은 것, 몸을 건강하게 하는 성분을 포함한 식품을 대량으로 섭취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져 왔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코코아의 폴리페놀이 몸에 좋다고 TV에서 방송되면 다음 날엔 코코아가 마트의 진열대에서 사라지곤 했다. 요구르트가 면역력 강화에 좋다는 이야기가 돌면 모든 이들이 집에서 요구르트균을 배양해 먹곤 했다.
하지만 그런 일시적 대응보다 균형 잡인 생활을 하는 편이 좋다는 인식이 점점 늘어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됐다. 아무리 몸에 좋은 것이라 해도 대량으로 불균형적으로 섭취하기보다는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소량 섭취하는 편이 현명한 건강법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리먼 사태를 통해 버블 붕괴 이후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며‘ 이 이상 나빠지지는 않을 테니 이제 적극적으로 나서자’라는 일본 소비자의 인식전환이 자리 잡고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현실에서 검증하기(제 3단계)
제 3단계로서,‘ 진한 맛’ 붐을 다른 식품에도 적용시킬 수 있고, 사회적 트렌드가 됐다는 점을 확인한다. 일본에서는 가정용 조리용품 중에서도 에스비식품의‘ 진한 스튜’가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고, 모리나가유업의‘ 진한 리치푸딩’, 이토엔의‘ 오이오차 진한 맛’ 등 진한 맛을 소구하는 식음료가 늘어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웰빙 붐이 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분이 바뀐 것이다<표 4>.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의 나침반이 되다
200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빅히트상품이 사라져‘ 시대의 흐름’도 보이지 않게 됐다. 이는 다양한 소비상황을 경험해온 세대가 혼합됐기 때문이다.
성장시대에서는 다음 세대도 기성세대와 동일한 소비를 경험할 수 있었지만, 저성장시대인 현재 사회에서의 트렌드는 한 세대 속에서 각기 분단된 채공유되고 있다. 그럼에도 어느 시대에서든 트렌드의 발견과 전파는 광고회사의 중요 역할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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