賢者의 旅行
이 현 종
대표 CD - Chief Creative Director / jjongcd@hsad.co.kr
“그러니까 아침은 로마에서 간단히 먹고 점심은 런던에서 그리고 저녁은 파리에서 하는 거야.”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꽤 근사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잠시 동안-아주 아주 잠시였지만- 세계 여기저기에 집 몇 채쯤 가지고 있는 사람의 호사스러운 미소 같은 것도 지어보였던 것 같다. 새벽같이 일어나 부랴부랴 짐을 싸는 모습들이 안쓰러워 내뱉은 말이었는데, 들었는지 말았는지 대꾸들이 없었다.
잠이 덜 깨서 그런 것이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 5시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했다. 비몽사몽, 야반도주처럼 싸구려 호텔-로마의 호텔이라곤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을 떠나 공항에 도착한 우리의 손에 쥐어진 건 아침식사에 해당하는 햄버거였다. 햄버거를 빨리 먹고 오전에 런던에 도착하면 머리에 이상한 털모자를 쓴 버킹검 궁 근위병들의 교대식을 보고 대영박물관을 속성 정복한 다음 타워브릿지를 찍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좀 고돼도 저녁엔 파리가 기다리고 있잖아… 그 멋진 파리가~ 가이드의 얼굴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하루 일정으로는 환상적이지 않아요? 정말 알차고,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자뻑에 취한 가이드의 입에 햄버거라도 넣어주고 싶었다.
10여년전의 일로 기억된다. 회사도 그만두고 모처럼 여유도 생겨 가족들에게 속죄의 여행을 떠나겠다는 선언 아닌 선언을 하고 선택한 것이 서유럽 패키지여행이었다. 어떤 이들은 매년 간다는 해외여행이었지만 우리 가족에겐 처음 있는 일이라, 나름 무리해서 프리미엄 패키지로 질렀다. 여덟나라를 열흘 안에 구경시켜주겠다는….
하지만 프리미엄 패키지라는 말이 프리미엄하게 돈을 버리고 온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 것 정도가 그 때 가져온 추억이었다(그래도 가끔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그럴듯해 보이는데, 온갖 유럽의 명소를 누비고 다녔음을 입증하고자 하는 데에는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사진은 결코 진실의 포착이 아니다, 사실일지언정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잘 봐야 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경험은 유럽을 갔다 왔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온 가족이 집 아닌 다른 곳에서 열흘 이상의 시간을 완벽하게 공유했다는 것이다. 요즘 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스무 살 안팎의 큰애들이 되어 버려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은 어느 나라를 어떻게 갔다 왔는지 도통 기억이 없단다. 현명하지 못한 아빠를 만난 탓이리라(그 이후로 가족 여행 이라는 걸 간 것도 손꼽을 일이지만, 그 때마다 패키지여행이라면 다들 손사래부터 친다).
아무튼 여행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거나 여행광이 아닐 바에야 우리네 가족여행이라는 것이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여행-관광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지만-에서조차 최소비용에 최대효과 (짧은 시간에 많은 장소)라는 공식을 적용시켜야 후련하게 생각되는 건 서글프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땅에선 여행마저 성과지향적이다.‘ 올해는 어디 어디 갔다 왔어’ 정도 얘기해야 잘 살고 있는 걸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낯선 여자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인증샷여행은 사절이다. 그러느니 한평생 쾨니히스베르크 백마일 밖을 떠난 적 없는 칸트의 길을 따르겠다. 그의 정신을 고양시킨 건 여행이 아니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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