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긴 시간의 여운
구 선 아
BTL프로모션팀 차장 / koosuna@hsad.co.kr
올해는 유난히 단편 소설집을 많이 찾은 나였다.
본래 다양한 소재와 빠른 전개를 가진 단편 소설을 좋아하는 나지만, 요즘 들어 단편 소설들이 더 흥미로운 건 왜일까. 아마 요즘 내가 여러 군상들의 모습, 사람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며 살아간다. 그 역사 속에서는 영웅도, 악인도, 주인공도, 엑스트라도 모두 자신에게서 비롯되고 만들어진다.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과 나 외의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은 작가의 페르소나로 작가를 투영한 누구일 수도 있고, 작가 본인일 수도 있고, 작가가 새로 만든 캐릭터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작가의 작품들을 오랜 시간 읽다보면 주요 등장인물이 가진 일관된 경향을 찾게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사람에게서 시작되고 사람에게서 끝이 난다. 판타지이거나 스릴러이거나 역사적이거나 혹은 사실적인 이야기라도 모든 것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이번에는 사람이 드러나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가진 단편 소설집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야기도 나누면 그 재미가 더 커지지 않을까.
<악기들의 도서관>
유일하게 빼놓지 않고 챙겨듣는 팟캐스트‘ 빨간책방’을 이동진 평론가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김중혁 작가의 책이다. 사실 팟캐스트를 들으며 인간적인 매력에 더해 작품에 대한 매력도도 증가한 사례다. <악기들의 도서관>은 음악을 좋아하는 김중혁 작가의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난 책이다. 유쾌한 작가의 성향과 음악을 좋아하는 마니아적 취향이 더욱 감각을 발휘한다. 책 속에는 8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대부분 음악과 관련된 소재들로, 작가의 엉뚱하지만 있을법한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나는 8편의 단편 중‘ 매뉴얼 제너레이션’과‘ 비닐광 시대’, 그리고 ‘악기들의 도서관’에 제일 마음이 끌렸다. 무언가 한 분야의 디자인과 트렌드·콘텐츠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 마치 장인 디자이너의 모습과도 같아 보이는‘ 매뉴얼 제너레이션’과 무언가 하나에 빠져 집착하고 수집하고 자신과 동일시하는 듯이 좋아 미치는‘ 비닐광 시대’, 그리고 새로운 상점의 탄생, 새로운 콘텐츠의 탄생, 컨셉트를 가지고 소비자와 만나며 자신의 삶에 즐거움도 찾게 되는 이야기를 가진‘ 악기들의 도서관’이다.
자동피아노 / 매뉴얼 제너레이션 / 비닐광 시대(vinyl狂 時代)/ 악기들의 도서관 / 유리방패 / 나와 B / 무방향 버스 - 리믹스, ‘고아떤 뺑덕어멈’ / 엇박자 D
<당분간 인간>
아, 처음에 이 소설집을 접하고 탄성을 자아냈다. 물론 개인의 취향이긴 하지만 너무 좋아하는 소재의 책이다. 일단 제목부터 마음에 쏙 든다.
그리고 소소한 일상으로 지나칠 수 있는 일들을 한두 명의 주요인물과 함께 이벤트화시켜 판타지와 일상의 경계를 넘나듦을 보여주고 있다.
단 한편의 이야기도 소홀히 대할 수 없다. 사실 서유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본 적도 없고, 책장에 책 한 권 꽂혀있지 않은 작가여서 처음 책을 집어 들었을 때는 미심쩍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같은 단편 소설집을 두 번이나 읽다니. 특히나 엄청난, 어마어마한 폭설에 손으로 눈을 파내며 출근하는 주인공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 스노우맨’이나, 자신의 지하 단칸방과 고층 아파트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서로 집을 바꿔가며 잠을 자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그곳의 단잠’, 회사와 사회의 스트레스와 면역력 저하로 온몸이 가루가 되거나 말랑말랑해지는 과정과 감정을 보여준‘ 당분간 인간’, 타인의 삶을 일거수일투족 관찰하고 훔쳐보다가 결국에는 탐미의 지경에 이르러 그의 삶인지 나의 삶인지 분간할 수 없어지고 그의 삶과 닮게 살아가는‘ 타인의 삶’ 등이 실려 있다. 아마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던질 수 있을 이야기들이라 생각된다.
스노우맨 / 그곳의 단잠 / 저건 사람도 아니다 / 삽의 이력 / 당분간 인간/ 타인의 삶 / 세 개의 시선 / 검은 문
<도시와 나>
세상엔 참 재미있는 책들도 많고, 읽고 싶은 책들도 많고, 읽어야 할 책들도 많다. 특별한 컨셉트로 만들어진 이 책, 특히나‘ 도시’라는 키워드에 집착하는 나로서는 이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도시와 건축·공간이라는 키워드를 가진 소설집이나 에세이집이라면 손부터 먼저가는 나다.
여행과 도시를 소설이라는 포맷에 결합한 듯 보이는 이 책은 실제 도시 속에서 작가의 상상 속 여행이 펼쳐진다.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뒤섞여있다고 해야 할까. 책을 보며 도쿄에 다시 가고 싶어졌고, 나오시마 섬에 가야겠다며 비행기 표를 검색해 봤으며, 아비뇽은 어떤 바람을 가졌을까 궁금해졌고, 브장송의 여름은 어떨까 상상했으니 말이다.
더 재미있는 건 여러 작가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긴 책인지라 각 소설마다 다른 분위기와 캐릭터를 가지고 있고, 도시를 경험하는 혹은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다른 만큼 독자들도 각 이야기마다 도시를 상상하게 만드는 색다른 방법에 매료된다. 또한 이 도시들에 방문하게 될 계획이 있거나 이미 도시를 거닐어 봤던 사람들은 아마 또 다른 상상적 경험에 설렐 것이다.
성석제 - ‘사냥꾼의 지도: 프로방스의 자전거 여행’ (아비뇽)
백영옥 - ‘애인의 애인에게 들은 말’ (뉴욕)
정미경 - ‘장마’ (도쿄와 나오시마 섬)
함정임 - ‘어떤 여름’ (브장송)
윤고은 - ‘콜럼버스의 뼈’ (세비야)
서 진 - ‘캘리포니아 드리밍’ (로스앤젤레스)
한은형 - ‘붉은 펠트 모자’ (튀니스)
<여자는 두 번 떠난다>
한 때 일본 작가들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만 꾸준히 챙겨봐 오다가 오랜만에 요시다 슈이치의 책을 읽게 되었다. 순전히 제목 때문에 산 책이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책을 좋아하게 된 후로 책 제목에‘ 남자’나‘ 여자’가 들어가고 이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소설집들은 꼭 사는 편이다. 읽으려고 산다기보다는 수집에 가까운 소비이긴 하다. <여자는 두 번 떠난다>는‘ 당분간 인간’과 비슷한 컨셉트지만 분위기는 현저히 다르다. 좀 더 소소하고 조용하고 서정적인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읽을 때는 흠~, 예상했던 것보다 글들이 평평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다 읽고 책장을 덮은 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마음이 점점 더 쓰이는 이야기들이었다.
갑작스레 시작된 사랑에 여자를 계속 시험해보지만 여자는 떠나고 나중에야 알게 된 여자의 상처와 아픔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 장대비 속의 여자’와, 여자를 안고 싶은 마음에 여자에 살짝 낚싯바늘을 드리우고 결국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마는‘ 공중전화의 여자’, 그리고 평소에는 그렇게도 잘 울다가 진정 남자와 여자 사이에 원치 않은 아이가 생기고 아이를 원치 않음을 남자가 밝혔을 때는 쿨한 미소로 대답하는‘ 울지 않는 여자’는 아직도 세부묘사까지 기억이 날 정도다.
장대비 속의 여자 / 공중전화의 여자 / 자기 파산의 여자 / 죽이고 싶은 여자/ 꿈속의 여자 / 평일에 쉬는 여자 / 울지 않는 여자 / 첫 번째 아내 / CF의 여자/ 열한 번째 여자 / 연예 잡지를 읽는 여자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면 잠시나마 새로운 시간과 장소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가끔은 내가 그녀가 되기도 하고, 그가 되어 보기도 하고, 작가가 되어 이야기를 바꿔 보기도 하고, 신이 되어 멀리서 지켜보기도 한다. 단편 소설은 많지 않은 등장인물로 간결하고 짧은 이벤트를 빠르게 전개해 나간다. 혹자는 장편 소설에 비해 단편 소설을 가볍다고 여겨 저평가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래서 더욱 단편 소설들을 좋아한다. 짧은 이야기로 흡입력 있게 독자들을 빨아들이는 능력은 그리 가볍지 않은 시간과 노력에 의해 나온다.
광고도 그렇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차근차근 이야기를 전개하며 풀어줄 수는 없지만, 그 짧은 시간에 압축해 많은 이야기를 혹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15초의 미학’이라고도 말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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