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02 : 책 속의 겨울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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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겨울


구 선 아

BTL프로모션팀 차장 / koosuna@hsad.co.kr




이제 곧 입춘이다. 겨울이 지나간다. 살랑거리는 봄바람과 흩날리는 벚꽃 잎을 기다리는 나지만, 빵빵한 패딩을 입고 뽀송한 장갑을 끼고 복신한 모자를 쓰고 눈밭을 거닐 수 있는 이 겨울이 조금은 아쉽다. 아마 나 말고도 겨울의 끝자락이라도 움켜잡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듯하다.

날씨가 추워진 후로는 백화점·아울렛·로드숍의 아웃도어 매장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가득하다. 요즘 아웃도어 시장은 말 그대로 전쟁.

소비자들이 레저나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기능성 옷을 찾아 입는 것이 아니라 일상복으로도 입기 시작하면서 기존 브랜드들은 세컨드 브랜드까지 만들어 타깃을 분리하고 제품군도 확장하고 있다. 런칭 후

일 년 사이, 매출이 전년 대비 20%에서 많게는 40% 이상까지 성장하면서 이들의 광고 경쟁은 더욱 뜨겁다.

핫하다는 스타들은 모두 아웃도어 광고에서 찾아볼 수 있고, 금방이라도 배낭을 둘러메고 떠나고 싶은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풍광들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역시 아웃도어의 본질은 자연으로의 떠남이니….



그 나라의 겨울

겨울의 시그니처는 역시 눈이다. 눈이 없는 나라, 눈이 없는 풍광의 겨울은 그냥 조금 더 추운 가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나는 이번 겨울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단 말이기도 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책만큼이나 유명한 어느 소설의 서두이다. 어떤 소설인지 떠오르는가.

이는 일본의 겨울 풍경을 샅샅이 훔쳐볼 수 있는, 일본에 최초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서두이다.

<설국>은 짜임새 있는 스토리보다, 무위도식하는 시마무라를 중심으로 고마코·요코와의 마치 희곡과도 같이 끊이지 않는 대화문들, 그리고 서정적이다 못해 적요하기까지 한 눈 마을의 풍경 묘사가 주를 이룬다.

단편을 쓰고 모으고 이어 13년간 집필한 <설국>의 주 배경은 ‘온통 눈뿐인 그 곳의 하늘은 아직 밤 빛깔인데 산과 마을은 이미 하얗게 아침’이 드리워진 니가타 현의 에치고 유자와 온천 마을이다.

눈 바지를 입고 눈 집을 짓는 아이들의‘ 새 쫓기 축제‘와 눈 속에서 실을 만들어 눈 속에서 짜고 눈으로 씻어 눈 위에서 바래는 옷감인 지지미가 펼쳐진‘ 눈 바래기 풍경’, 산기슭의‘ 스키장’과‘ 온천 풍경’ 등 눈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 가득하다. 내가 아웃도어로 무장하고 여행하고 싶은 겨울은 이런 풍경 속의 모습이 제일 가깝다. “제각기 산의 원근이나 높낮이에 따라 다양하게 주름진 그늘이 깊어가고, 봉우리에만 엷은 볕을 남길 무렵이 되자, 꼭대기의 눈 위에는 붉은 노을이 졌다.”문장마다 손가락을 짚고 읽어 내려가며 주름진 그늘 사이와 봉우리에 나의 발자국이 남겨지는 모습을 풍경 안에 더해본다.


계절이 포개져 있는 숲

그리고 여기 조금 다른 한국의 겨울도 있다.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이다. “거기에 눈이 내렸다. 그러고는 눈뿐이었다”는 남쪽과 북쪽의 경계, 휴전선 이남의 강원도 어디쯤의 겨울이 이 책 속에 있다. 겨울과 계절이 포개지는 봄과, “늙은 숲의 냄새는 깊었고 젊은 숲의 바닥 냄새는 얇고 선명했다” 는 여름의 숲, 그리고 바람에 흔들거리는 가을의 숲까지 알차게 담겨있다. 세밀화를 그리는 주인공에 의해 숲에서 자라는 꽃과 나무의 세세한 모습이 눈앞에서 보듯 읽혀진다. 멋진 문장이 많은 <내

젊은 날의 숲>이지만,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작가의 서문이다.

최고의 서문이라 일컬어지는 <칼의 노래>와 견줄 만큼 아름다운 문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랐는데, 풍경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풍경은 태어나지 않은 말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적막강산이었다...(중략)...구름이 산맥을 덮으면비가 오듯이, 날이 저물면 노을이 지듯이, 생명은 저절로 태어나서 비에 젖고 바람에 쓸려갔는데, 그처럼 덧없는 것들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눈물겨웠다.


김훈 작가가 1년 가까이 여행을 하며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라며 쓴 것처럼 가와바타 야스나리 작가도 실제 그 온천에 머물며 소설을 집필했던 것은 눈과 함께 고요히 가라앉은 마을 산기슭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

소설 속 문장, 특히 풍경을 묘사할 때에는 한 나라의 고유한 정서와 문화가 문장에 그대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풍경은 그냥 자연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그 곳에 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만든,일체성과 정체성이 있는 지역 고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배낭 메고 떠나고 싶은 자극을 주는 것은 아웃도어 광고나 이런 소설이나 매한가지니 말이다.

다시 나는 엷게 눈을 인 삼나무 숲 속에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적갈색 단풍이었을 때는 겹겹이 쌓여 하나의 묶음처럼 보이던 숲이 눈을 이고 하나하나 또렷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하늘을 향해 찌를 듯 눈 위에 서 있는 모습을, 그 옆에 두 팔 벌려 누워 있는 나를, 텐트를 치고 여유로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를, 눈밭을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듯 눈에 풍경을 담고 있는 나를, 그리고 배낭을 메고 “ 바람의 끝자락이 멀리 지나온 시간의 숲까지 흔들었다” 는 겨울 숲의 어딘가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나를 말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