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연/동국대국문과교수
영화'여고괴담'의 포스터
엽기문화 유행의 세 가지 원인
그러나 신작 공포물의 쇄도는 전혀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공포감과 혐오감을 부르는 ‘기괴한 것’은 한국 대중문화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진작부터 유행하고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여름 특수(特需)를 위한 문화상품의 재료가 아니라 대중문화 공통의 주요 레퍼토리이다. <여고괴담>에서 <섬>에 이르기까지 영화에서 공포물이 꾸준히 제작된 사실이나, <퇴마록>으로 대표되는 유령담이 놀라운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연속 출간된 사실 등을 보더라도 기괴한 것에 대한 열광이 대중문화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영화'섬'의 포스터
영화'퇴마록'의 포스터
둘째는 지구적 문화의 형성이 원인이다. 현재의 문화 생산과 소비는 이른바 지구화라는 과정과 맞물려 국가의 경계를 넘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문화 자체도 다국가적인 혹은 초국가적인 성격을 띠어가고 있다. 어느 특정 국가나 지역에서 생겨난 문화적 코드가 다른 국가나 지역에서 모방을 낳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소설에서 모더니즘, 영화에서 헐리우드 문법 같은 것은 이미 그 장르 자체의 일반적 코드에 속한다. 문화의 지구화는 엽기문화가 지금과 같은 양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토대를 이룬다.
영화'텔미 썸딩'의 포스터
‘지나친 욕망’에의 진지한 이해 필요
고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엽기적 관심에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칸디나비아와 동부 유럽을 본거지로 하는 약탈적, 호전적 성향의 부족을 가리키던 명칭(고드)에서 파생된 말인 고딕은 유럽어에서는 문화의 타자에 대한 범칭과 다를 바가 없다. 18세기 이래 유럽문학과 예술에 나타난 고딕 부흥은 계몽주의가 인간과 인간 사회로부터 축출하고자 했던 야만, 광기, 미신에 매혹된 결과였다. 고딕적인 것의 본질은 이성의 인도에 따라 정열과 공포를 정복한다면 인간의 행복과 성취가 가능하리라는 계몽주의의 낙관점 신념에 대한 반발이다. 그래서 고딕적인 것의 문학적, 예술적 표현은 인간에게 내재하는 전복과 위반의 충동,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의 환상을 포착하는 데에 주력한다. 문학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고딕적인 것은 아예 ‘고딕 픽션’이라고 불리는 뚜렷한 전통을 근대문학에 남겼다. 이 고딕 픽션의 전통 속에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 사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포의 <어셔가의 몰락>을 위시하여 현대 공포물, 스릴러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들이 포함된다.
따라서 엽기적 영화나 소설을 일부 비판자들처럼 단지 예술의 타락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인식이라는 측면 또는 문화의 자기반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예컨대 장윤현의 <텔미 썸딩>을 보자. 조형사(한석규)가 남자들을 잇달아 살해하고 시체를 토막내 유기한 범인을 잡기 위해 수사를 벌이는 플롯을 중심으로 신체 절단을 비롯한 각종 잔혹한 장면을 펼쳐보이는 영화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한 성적 학대 때문에 정신적 상처를 입은 여자인 채수연(심은하)이 남자들을 상대로 벌이는 광기 어린 복수극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상장을 달고 있는 조형사의 모습을 비롯한 주요 이미지와 액션을 살펴보면 여성들에게서 재래의 모성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워진 현대 남성들의 불안이 거기에 투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목이 잘린 남자 시체와 같은 계산된 이미지들은 남성 무의식에 자리잡은 거세 공포에 직설적으로 호소한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여성의 자아 주장과 여성집단의 사회적 성장에 따라 심리적으로 곤경에 처한 남성 자신을 돌이켜 보게 만든다.
호러사이트 '호러 존'(왼쪽)과 호러웹진 '괴물단지'(오른쪽)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 역시 그리 간단치는 않다. 이 소설에는 아이들을 납치해 자기 집 지하에 감금해놓고 포르노그래피를 찍는 젊은 부부가 등장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어두운 정열과 광포한 권력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황량한 디스토피아가 제시된다. 여기서 인간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지 우발적인 물질 합성에 불과한 존재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반휴머니즘적 담론은 권력이 어떻게 인간을 왜곡하는가, 권력으로부터의 탈주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 알레고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엽기적 관심을 노출시킨 한국 영화나 소설 중에서 이러한 인식과 반성의 효과를 낳는 작품은 아직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스릴러물이나 공포물, 고딕 픽션이나 유령담의 정형화된 문법에 따라 기괴한 것을 즉물적이고 선정적인 양상으로 표출하기에 급급하다.
‘엽기문화’의 유행이 문화의 갱신을 위한 실험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운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기괴한 것의 판타지를 인간과 문화에 대한 물음과 의미있게 연관시켜야 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특수한 분야나 매체를 넘어 직면한 과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섬뜩한 공포와 전율을 연출할 것인가 하는 고려 이상으로 인간의 지나친 욕망, 정열, 권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요구한다. 문화의 타자를 얼마나 진지하게 인식하고 표현하느냐는 바로 그 문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Archive > Webzine 20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0/07-08 : 광고와 문화 - 당신의 광고는 쉽습니까? (0) | 2010.07.27 |
---|---|
2000/07-08 : 광고에 말걸기 - 센세이셔널하면 그만인가? (0) | 2010.07.27 |
2000/05-06 : New sightings - 상상의 눈 (0) | 2010.07.27 |
2000/05-06 : 감성 커뮤니케이션과 크리에이티브 전략 - 감성 라포르를 통한 만족의 창출 (0) | 2010.07.27 |
2000/05-06 : 디지털시대의 커뮤니케이션 키워드 - 하드웨어는 디지털, 소프트웨어는 감성 (0) | 2010.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