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 RIP
정 현 진 | 브랜드액티베이션2팀 대리 | cristalzzang@hsad.co.kr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의지’였던 것 같다
지금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껴지는 17년 전, 응답하는 1997의 학원가에서는 손수 녹음한 테이프를 포켓 속 금성 ‘아하’또는 ‘마이마이’ 카세트에 몰래 재생해, 선생님을 감히 따돌리며 내가 DJ가 되어 ‘마이’ 노래를 ‘마이’ 시간에 맞춰 듣는 것이 일종의 계급이었다. 학교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야자를 하고, 군것질을 하고, 학원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것이 응당 치러야만 하는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의무였기에, 피폐해진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건 포켓 속‘ 마이’ 카세트,‘ 마이’ 노래들이었다.
흩뿌리는 가로등을 조명 삼아, 한 쪽은 이미 닳아버린 이어폰을 귀에다 큼지막하게 쑤셔 넣고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잔소리를 잔인하게 닫아 버린 후, 작정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길은 당당하다 못해 장엄하기까지 했다. 응당 치러야만 하는, 볼 빨개진 사춘기 시절의 넋이 애틋한 그녀의 몸과 정신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노라면 귀가하는 그 길은 응답하던 1997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이 갖는 유일한 낙이자 권리였다. 그렇게 많은 별빛 속에, 그렇게 많은 상상과 공상, 때로는 망상을 그리며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했던 그시간이 내게는 오직 유일한 ‘인터스텔라’이자 미래와 맞닿을 수 있는 공간이었고, 칠흑 같던 어둠의 시간 속에 영롱히 떠오르는 영감을 소재로 만든 나만의 희극이자 비극이었다.
오로지 그 시간은 철저히 ‘마이’ 시간으로 나만이 누리게끔 설계했었다. 결국 1997 가장 아련하고 추억이 서려 있는 귀갓길의 기억은, 공부에 지쳐 사랑에 지쳐 삶이 피폐해질 때 역설적으로 내게 ‘마이’ 꿈과 ‘마이’ 스테이지를 제공해주는 독창적이고 화려한 아스팔트 거리였다. 통상 아스팔트 위의 화려한 주인공은 누가 더 환상적으로 그것을 설계하느냐에 따라 결정지어졌는데, 이를 규정짓는 것이 바로 ‘누가 더 좋은 음악을 섭렵하고 있는 것이냐’였다. 바로 이것이 나도 모르게 설계된 ‘마이’ 꿈의 깊이를 마련해 준 토대였다.
집으로 돌아오라고 권유하는 서태지와 아이들, 그에 맞서 달콤한 캔디 사탕을 미끼 삼아 망치 춤을 추는 에쵸티의 비주얼도 나를 규정짓는 세그먼트 중의 하나였지만, 그것은 단지 나만의 스테이지에서 내가 설계한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 같다. 에쵸티의 망치 춤을 추고, 서태지의 랩을 성대모사하는 것은 학생의 입장에서 내가 넋을 놓아 기리던 그녀의 몸과 마음에 한발자국 더 다가가기 위한 넉살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응답해야 했던 1997 또래보다 심리적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선 진정한 나만의 감성, 나만의 무기, 나만의 노래가 필요했었다. 원하는 대학에만 가게 된다면 첫사랑과 결혼할 수 있다고 믿던 그 어처구니없던 순수 시대의 절정에서, ‘유레카’, 내가 발견한 그의 멜로디와 리듬은 내 감성과 마주한 채 나의 미래를 함께 설계해주었다.
매일 아침 성장판에 방해를 받으며 일어나야만 했던 나의 의지에 그의 노래는 내가 함께하고자 했던 미래의 ‘의지’ 그 자체였다. 그렇게 그의 도움으로 아스팔트 위의 18세 사춘기 딴따라는 성인의 성에 굴러들어와 세상과 소통하고 싸우다보니 어느새 더 그럴듯해 보이고 더 그럴싸해 보이는 동음이의적인 노래들로 내 영혼을 채워가는 듯했다.
응답하라 2014
어느 새 나는 ‘마이’ 꿈을 ‘마이’ 삶에 치환시켜야만 하는 나이가 되고, 어느 새 나는 그의 노래를 잊어버리는 나이가 된 채, 독창적이고 화려했던 가로등 등불 아래의 스테이지 주인공을 잃어버린 채, 철지난 상념과 푸념에 푸석해진 하루를 살아야만 하는 미생이 되어버렸다. 느낄 새도 없이 깨달을 새도 없이 우리의 인생은 저만치 물러날 때 즈음, 그 때, 신해철이 떠났다.
난 그와 그 어떤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의 노래에 대한 해석도 할 줄 모른다. 더군다나 그의 노래는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듯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노래가 내 스테이지 위에서 다시 살아난다. 난 지금 그의 노래를 들으며 옛날을 추억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판타지가 내게 와 닿는다. 그때는 와 닿지 않던, 그의 노래가 어느새 내게 넉살을 부리며 다가온다. <불멸에 관하여>·<일상으로의 초대> 이런 명곡이 나를 향해 비수를 꽂는다. 이제는 깨달을 수 있을까… 삶에 치환하던 꿈의 방정식이 다시 살아난다.
나도 크면 당신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라 업신여기면서 가로등 아래에서 세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스테이지를 설계하며 패기를 뽐냈었는데, 이제야 겨우 설계된 나의 미완성된 스테이지를 바라만 보고 있다. 나의 흑색 스테이지 위에 장엄하게 흩뿌려진 작은 문장 하나,‘ 시간은 반드시 흐르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어느 순간,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죽지만 죽은 사람은 시간을 돌아보게 하고 정신을 깨우치게 하니, 어쩌면 내가 발견한 진리는 단순한 껍데기 또는 쓰레기와 다르지 아니하다. 이 야심한 밤은 묘하게도 1997의 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여전한 시각이지만, 단 하루만이라도 세상을 위해 시대의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진다.
신해철의 죽음은 우리 시대 메시지의 상실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임진모의 글이 아니더라도, 부지불식간에 나도 그의 메시지에 의지하며 이 거친 무법시대를 여행하며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모든 의식은 접어둔 채 의식주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에게, 이제는 더이상 그의 메시지로 우리를 각성할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안도한다.
아직 많은 시간은 흐르지 않았고, 나의 생은 끝나지 않았기에, 마이 노래, 마이 메시지, 마이 꿈을 가지고 나이 더 마이 묵기 전에, 푸념과 묵념은 집어치우고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힘차게 어둠의 장막을 끌어내본다.
언젠가 5차원 속의 그가 관을 열고 우리를 단념시키며 이렇게 말할 때까지, 세상을 향한 나의 메시지는 계속 토해내고 싶다.
‘마이 묵었다아이가 이제 고마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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