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은 전쟁이다. 내보내려는 자와 나가지 않겠다는 자가 서로의 굳은 신념을 지키며 숨바꼭질한다. 아슬아슬하게 숨바꼭질하다 결국에는 소 내몰리듯, 선생님이 지휘하신 승리의 회초리 아래 신속히 운동장으로 향한다. 때마침 울려 퍼진 애국가 소리가 그 때는 야속하기만 했다.
사춘기의 터널을 지나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 제대로 된 삶에 대한 욕구와 좌절이 숨바꼭질하는 30대가 되니 나도 몰래 괜스레 눈물 나는 날이 있다. 슬픈 영화가 나를 자극한 것도 아니고, 어머니를 가슴 속에 외쳐보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 내 코를 쥐어짠 듯이, 나도 모르게 흘리는 가슴 먹먹한 눈물 같은 것 말이다. 지난 시절의 추억이 나를 감상에 젖게 하는 것인가? 우퍼 속에서 확장되어 내 귓속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의 진심이 때로는 나를 바보로 만든다.
“울컥”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부제 ‘푸틴 운동회’가 2월 23일 막을 내렸다.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국가대표 이상화 선수는 올림픽 신기록으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 TV속에 반사되는 나 또한 못난이 눈물을 가슴 속에 머금는다.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박승희 선수는 쇼트트랙 500미터 결승에서 1위로 달리 다 뒤에서 순위 싸움을 하던 영국과 이탈리아 선수에 걸려 넘어지면서 대한민국 의 올림픽 쇼트트랙 500미터 사상 최초 금메달을 눈앞에서 놓쳤다. 크게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위를 향해 또 한 번 일어서고 또 다시 넘어지는 그녀의 모습에 서 포기를 모르는 한국 여인의 자랑스러움을 보았고, 시상대에서 환하게 웃는 한국 여인의 사랑스러움이 나를 울컥거리게 했다. 시상대 맨 위에서 메달을 받고 애국가를 들으며 가장 환한 미소를 우리에게 전해줄 때 느끼는 전율은 내겐 굉장한 감정의 파동이 담긴 눈물이 되어 다가온다. 여신이 된, 김연아는 또 어떤가….
“철렁”
김연아는 ‘올포디움(All Podium)’을 달성했다. 출전한 모든 경기에서 3위 이상 입상했다는, 전설 같은 실제 이야기다. 이를 달성한 여인은 아무도 없었기에, 감히 그녀에게 ‘여신’이라는 닉네임을 붙여본다. 그런 여신이 자신의 마지막 대회에서 최고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을, 제왕 푸틴은 허락하지 않았다. 푸틴에게는 미소 냉전 이후 새로운 패러다임 속 패권다툼을 위해 국민이 아닌 백성들의 애국심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로마시대 검투사들의 화려한 칼 잔치에 가려진 잔혹한 정복전쟁의 그림자가 스파르타쿠스라는 반항아를 양산했듯이 ‘올리가르히’와 일반
백성들의 심각한 빈부격차를 심정적으로 두둔하기 위한 또 다른 아이돌로 소트니코바를 지목했는지도 모른다. 소트니코바의 금메달은 유리한 심판 배정과 당분간 밝혀지지 않을 어두운 그림자들 간의 암묵적 동의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진정한 승리자는 러시아를 외치는 백성들 사이에 흐뭇하게 승리의 ‘V’자를 그리는 아이스 콜로세움 위의 푸틴 황제가 아닐까?
“찰칵”
소트니코바는 수많은 카메라 세례 속에서 심판과 포옹을 하고, 기자회견에서 자신에게 질문이 주어지지 않고 김연아에게 집중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기행을 세계 각국 카메라 앞에서 당당히 선보이면서, 한국 네티즌들을 비롯한 연아 팬들의 단결력을 시험했다. 이쯤 되면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의 안톤 오노는 우리들 마음 속에 이미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다던가? 김연아의 채점 논란이 채 식지도 않은 시점에서 감히 여신이라 불리는 김연아의 남자친구가 공개됐다. 스타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사생활 침해는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그 타이밍이 절묘하다. 국민의 알권리와 개인의 사생활 보호,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가치를 기가 막힌 순간에 진실이라는 명분 아래 어느 인터넷 매체가 공개했다.‘ 여신’에서‘ 그녀’로 돌아온 김연아와 그녀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산업혁명 후 대량생산되는 옷감들처럼 순식간에 전 매체를 뒤덮었다. 확실히 흥미로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여신이기에 그렇게도 빨리 그녀를 인간계로 수직 낙하시켜야만 했나,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찰싹’
얼마 후, 소트니코바에 이어 또 다시 자랑스러운 러시아 삼색기가 빙판 위의 주인공이 된다. 진정한 승리자 푸틴의 걸작,‘ 빅토르 안’, 한국명 안현수가 2006 토리노 올림픽에 이어 2번째 3관왕의 위업을 달성한다. 그러나 내게는 이 장면이 생경하다. 들고 있던 국기가 가슴 뭉클한 태극기가 아닌, 흰색·파란색·빨간색이 가지 런히 놓여있는 단순미 가득한 삼색 러시아기를, 러시아인이 아닌, 그렇다고 고려인도 아닌, 한때 한국인이었던 쇼트트랙 황제가 그 깃발을 흔들고 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박근혜 대통령의 심정도 이심전심이었을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중이란다. 고리타분한 속담이 전형적으로 한국 빙상계를 강타했다. 한국명 안현수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쇼트트랙 선수였다. 부상과 파벌싸움에 힘을 잃고, 자신을 대우해 주지 않자 2011년 러시아의 제안에 국적을 바꾼다.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부상으로 얼룩진 퇴물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그는 올림픽에서 재기에 성공했고, 그를 내친 한국의 관계자를 역으로 내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올림픽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빙상연맹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결국 그는 한국에 비수를 꽂았고, 러시아 국기를 흔들고 있는 그의 모습을 뒤에서 애처롭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떡볶이 소스로 스파게티를 만든 것 같은 어처구니없는 마음이 내게만 전해진 것일까? 어른들의 구조적인 장난으로 인해 다시는 제2, 제3의 빅토르 안을 탄생시켜서는 안 될 것이라고, 흘러나오는 러시아 국가를 들으며 스스로를 인내해 본다.
이제 여름 이야기를 기다리며
흑해 연안의 휴양지 소치에서의 17일간 올림픽은 ‘찰랑’거리는 은은한 바람과는 다르게 ‘찰칵’ 찍힌 논란의 장면들이 우리의 감정을 ‘철렁’이게 하고, 때늦은 대처로 바르지 못한 일에 대해 ‘찰싹’ 회초리를 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우리를 ‘울컥’이게 만든 자랑스러운 그들이 있기에 한겨울 미세먼지와 혹독한 추위마저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조회시간에 울려 퍼진 애국가의 추억이 어느새 올림픽의 뭉클한 감동으로 이입되듯이, 소치의 ‘희노애구애오욕’이 가득 담긴, 2014 겨울 이야기는 내 작은 기억 속 어딘가의 서랍 속에 넣어두고, 이제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여름의 브라질에서 지금의 감동과 감정을 느끼기를 기대한다. 그 때에는 ‘울컥’하는 마음만이 TV 속 우퍼 소리를 통해 나를 달래주길 조심스레 기도해본다.<사진출처 : korea.net, wikipedia.org, sochi2014.ru>
정 현 진 | 브랜드액티베이션2팀 대리 | cristalzzang@hs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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