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fference Art
꿈꾸는 자들의 초상
윤두서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뚜렷했던 인물이다. 그의 자화상에 그려진 부리부리한 눈매에 관자를 무섭게 노려보는 듯한 눈동자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아울러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말없는 외침이었다.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대대로 초상화를 생산하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특색 있게 발전시키며 기록·보관하여 왔다. ‘초상(Portrait·肖像)’은 특정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사진이다. 실제 인물과 유사함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고, 화가 자신의 개성적 시각이 이입되는 경우도 있다. 현대에 와서 이미 사진이라는 매체가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초상화는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위치와 가치를 가지고 끊임없이 활용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왕의 초상을 그리는 어진(御眞)이 전해져 내려오듯, 지금도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면 당대의 가장 훌륭한 초상화 작가를 초청해 대통령의 초상을 제작한다. 사물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매체인 사진이 있음에도 인간은 왜 아직도 초상화라는 그림을 그려서 기록을 남기려 할까?
초상화를 왜?
초상화는 단지 얼굴을 똑같이 그린 그림이 아니다. 초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적인 묘사 그 이면에 그 사람의 내면과 성격, 그 사람의 삶이 표출된다. 그 사람이 살았던 사회상황과 환경, 심지어는 그 사람이 고민하고 있는 시대상황이 나타나기도 하고, 개인적인 성격과 연민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는 사람이 어떤 시각으로 접근했느냐에 따라 같은 인물이 모두 다르게 표현되기도 한다. 작가가 한 인물을 좋은 사람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리는 작가의 해석에 따라 다 달라지는 것이 초상화이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중국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朱元璋)의 것으로, 온화하고 단정한 초상화와 정반대로 음험하고 추악한 초상화의 두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천연두로 한쪽 눈을 잃은 일본의 에도 막부 시절의 무사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초상화도 본인의 요구에 의해 의도적으로 양쪽 눈이 다 그려져 있다.
각각의 초상화들은 그 제작의도와 사용목적에 따라 다른 시각을 나타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력을 잡은 자들이 그 권력의 힘을 과장되게 표출하기 위한 초상화도 있으며, 유명 정치가나 사업가들이 자신의 존재와 과업을 기리기 위해 초상화를 남기곤 했다.
종교적인 상징의 목적으로 그려지는 초상화도 있으며, 사회주의처럼 선전·선동용으로 제작되는 초상화도 있다. 가문의 과시용으로 자기 선조들의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고, 일반인들조차 초상화를 통해 개개인의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기도 한다.
‘형상을 통해 정신을 전달한다’
초상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의 차이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서양의 사실주의 미학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재현해 내는 데 몰두하게 되는데, 르네상스 시기에 시작된 원근법이나 해부학·명암법·색채론 등이 모두 사물이나 인물을 똑같이 그리기 위한 기법으로 쓰이기 시작해 발전됐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천재로 추앙 받는 것도 원근법과 해부학적 탐구에 기초하여 그림을 그림으로써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한국의 초상화가 어느 시대에서부터 출발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존하는 문헌이나 작품에 의하면 그 출발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의 회화 역시 서양의 초상과 마찬가지로 붓과 먹을 이용해 사실주의 기법으로 세부적으로 털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자 했다. 서양의 사실주의처럼 단지 똑같이 재현해내는 것 자체의 목적보다는, 이러한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그 사람의 정신까지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은 해석이다.
조선의 초상화가들은 ‘터럭 하나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라는 개념 아래 대상 인물과 똑같이 닮게 그리기에 힘을 쏟았다. 이를 통해 ‘형상을 통해 정신을 전달한다(傳神寫照)’는 철학을 추구했다.
즉 본받을 만한 위대한 인물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초상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설사 서양과 같은 입체감은 없었다 하더라도 사실적 접근을 극대화함으로써 그 인물의 총체적인 개념과 사상, 정신과 내면까지 표현하려는 진지한 탐구의 정신이 숨어있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정묘호란 등을 거친 뒤 일본·청나라 등과 교류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물이 도입되며 자연스레 서양화법도 유입돼 원근법이나 명암법이 서서히 도입되는 양상을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서양문물의 도입이 가져다 준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수원 용주사(龍珠寺)에는 김홍도가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후불화(後佛畵)’에 서양식 명암을 집어넣은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흥미를 더해 준다.
자아인식의 표출
서양의 초상화에서 동양과 다른 점 중 하나는 작가가 직접 자신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이 많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조선 18세기 윤두서의 자화상과 같은 걸출한 작품이 존재하기는 하나, 서양에 비해 화가가 직접 자신을 그린 자화상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다. 르네상스 이후 18세기까지 많은 서양의 화가들은 자화상에 세속적인 성공을 과시하거나 지적 자부심을 반영해 나타냈다.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의 부활로 인간의 모습과 활동, 개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수많은 개인 자서전이 나오고, 동시에 개인 자화상들이 그려졌으며, 그러한 전통이 현대에까지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린 자서전적인 그림이다. 단순히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내면의식을 드러내 보이는 그림이 바로 자화상이다. 이는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보듯이 자신을 성찰하는 자아의식에서 시작한다.
조선 후기 화단의 선구자격인 윤두서는 18세기 남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자아에 대한 인식이 뚜렷했던 인물이다. 그의 자화상에 그려진 부리부리한 눈매에 관자를 무섭게 노려보는 듯한 눈동자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아울러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말없는 외침이었다.
서양에서는 화가의 신분이 점차 상승하고 근대적 자아의식이 싹틈으로써 자화상이 활발하게 그려졌다. 르네상스 이후 많은 화가들은 자신의 직업을 단순한 기능이 아닌 고귀하고 지적인 직업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화상에 자신의 성공과 스스로의 의식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이다. 렘브란트는 63년이라는 생애 동안 약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이토록 방대한 자화상을 그린 화가는 회화 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그 작품들의 제작시기도 화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젊은 시절에서부터 파란만장한 굴곡의 중년을 거쳐 파산선고를 받는 노년에까지 꾸준하게 그려져 있다. 마치 인간 삶의 고달픔을 반영이라도 하듯 노년의 그의 자화상은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다. 렘브란트에게 있어 자화상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와 내면의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마치 자신의 예술적 편력과 개인적 인생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는 이정표와 같아 보인다.
나만의 생각, 나만의 스타일을 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