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fference Art
‘벽에 걸려 있는 건 더 이상 작품이 아니다’
전시장 벽면에 붙어 있던 미술이 무대 위 공연으로 변모하고, 미술가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기획과 연출을 도맡게 된 데에는 ‘대중소통’이라는 화두를구호 이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다.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서울 스퀘어 건물의 전면은 LED 모듈로 감싼 '서울 스퀘어 미디어 파사드’다. 폭 99m, 높이 78m로 초대형 미디어 캔버스인 셈인데, 이 초대형 화면으로 줄리앙 오피를 비롯한 여러 미디어 작가의 작품이 상영된다. 중간에 상업광고가 끼어들지 않는다. 종래 도심의 전광판에서 틀어지는 상업광고 사이사이에 미디어 작품을 틀었던 선례가 있는데, 그에 비하면 크기로 보나 대중의 이목을 끄는 집중도로 보나 뉴미디어를 사용한 공공미술의 위상이 예전과 많이 달라진 셈이다. 말하자면 미술관에서 애써 찾아가서 보는 예술이 아니라, 도시 경관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안착했다는 얘기이다.
미디어가 의사소통을 돕는 도구이고, 예술은 소통을 위해 미디어를 사용한다는 사실로부터, 지식정보사회가 된 오늘날 예술은 당연히 뉴미디어를 소통의 도구로 삼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 미디어 아트는 여러 종류로 분화되어 나타난다. 비디오 아트는 제도권 영화와 거의 유사해지고, 일부 작가는 숫제 영화계에서 활동한다. 한편 영화가 대중예술이 된 오늘날, 기존 영화들을 짜깁기해서 새로운 미디어 예술을 만드는 미디어 아트도 나타난다.
‘영화라 해야 하나, 미술이라 해야 하나’
2010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미디어 아티스트인 태국 영화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전생을 기억하는 분미 아저씨)>에게 돌아갔다. 이외에도 장르적으로 실험영화에 가깝지만 미술계에서 활약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는 많다. 3시간이 넘는 <크리매스터 사이클 3>는 전시장이 아니라 극장에서 상영해야 하는 미디어 아트이다. 빌 비올라(Bill Viola)의 고해상도 화면도 영화적 서사와는 달리 슬로 모션으로 강한 명암 대비의 화면을 만드는 일종의 디지털 바로크 영상물이다.
한편 크리스챤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가 하루 24시간을 통째로 작품으로 만든 <시계>(2010)의 경우 자기가 촬영한 영상 없이 종래의 영화 수백 편의 화면들로 짜깁기해서 만들었다. 뉴미디어 콜라주 작업인 것이다. ‘영화로 편집된 시간’과 ‘관람자가 직면한 현재 시간’이 ‘어렴풋이’ 일치하는 순간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시계>의 장황한 러닝타임은 단숨에 압축된다.
한국에도 미술과 영화 사이를 오가는 작가가 있다. 영화감독 박찬욱의 동생 박찬경은 미술가이지만, 작품 <신도안>은 영화적 구성을 취한다. 2005년에 적은 작가노트에선 “10분은 미술관 작품으로는 너무 길다라”는 메모를 남긴 그이지만, <신도안>은 중편영화에 준하는 45분 분량으로 만들었다.
크리스챤 마클레이처럼 기성 영상물을 인용해서 완성했다. 1997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의 자료화면이 상당량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르적 경계를 중시하지 않는 박찬경은 결국 미술계와 영화계에서 동시에 활동하는 예술인이 됐다.
다윈예술의 시대, '작가에서 연출가'로 2005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되면서 다원예술소위원회라는 게 생긴다. 다원예술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관 차원에서 수용한 것이다. 다원예술도 미디어 아트의 확산이 만든 파생적인 예술창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디어 아트가 미술의 정의와 작가의 역할을 재조정하면서 각 예술 장르 간의 분명한 경계가 사라지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다원예술은 용어 자체가 말해주듯 ‘여러 장르의 예술이 같은 무대에서 협업을 통해 융합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다. 올해 3월 22일부터 4월 16일까지 열리는 국내 유일의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의 첫 행사는 2007년 열렸고, 매해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표현의 수단이 미디어인 만큼 새로운 시대정신을 반영하기 위해 진화하는 뉴미디어를 계속 창작의 도구로 채택하는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사진작업으로 지명도를 얻은 정연두의 대학 전공은 조소였다. 하지만 사진작업을 거쳐 2007년부터 영화적 장치를 차용한 비디오 아트를 선보였고, 작품의 제작자 역할보다 여러 스태프를 통제해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는 연출가의 역할에 비중을 두고 있다. 미술가인 그는 마술사 이은결을 무대로 초대한 다원예술 공연 <시네매지션>을 무대에 올려 미술·연극·영화에 마술을 결합시키기도 했다.
다원예술은 변화된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려는 예술의 노력과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다원예술을 전시장보다 무대에 올리게 되는 이유는 2차원보다 3차원적 감각을 실현할 때 유리해서일 것이다.
‘작품에 손대지 마세요’는 미술관의 오래된 에티켓이다. 그러나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미디어 아트의 등장으로 이 오랜 공식은 옛말이 됐다. 물론 미술관 안에서는 작품을 직접 만지면서 즐거움을 얻는 관객은 매우 적다. 재미가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디어 아트가 확장돼 만들어진 다원예술은 바로 기존 미술이 놓친 관객과의 관계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의 첫 회부터 꾸준한 초대를 받는 홍성민은 <19금 퍼포먼스 릴레이>라는 공연을 오후부터 늦은 밤까지 여섯 시간 동안 같은 전시공간 안에서 열었는데, 이때 같은 시공간에 모여든 예술가와 관객들은 음식과 대화를 공유하면서 만남의 장으로 발전한다.
전시장 개막식의 오랜 관행 중에 음식물을 내놓아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이 있다. 즉 개막식은 출품작가와 방문자 사이의 사교의 장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다원예술 공연장이 음식과 대화를 나누는 만남의 장으로 변화되는 건 재미를 잃어버린 기존 미술의 따분함을 벗어나기 위해 사람과의 만남 자체를 아예 예술로 전유한 것이리라. 가령 태국 출신의 아티스트 리크릿 티라바닛(Rirkrit Tiravanija)은 품작 대신 식재료와 타이 커리를 관객에게 제공해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요리하거나 나눠먹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작품’이다.
이렇게 미디어 작업이 무대에 오르게 되면서, 관객과 예술가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는 작업의 수도 늘어났다. 미디어 작업을 하다가 다원예술로 발전한 국내 작가가 정연두와 임민욱도 그렇다. 일찍이 동심의 판타지와 소시민의 소망을 연출 사진으로 실현시킨 정연두는 후일 소외된 노인들의 고백을 수집해 세트로 구현한 <수공기억>(2008)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시도는 불특정한 개인의 소망을 대비되는 두 장의 사진을 통해 가상으로 실현시킨 초기 사진 <내 사랑 지니>(2003)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또 다른 미디어 작가 임민욱도 <뉴 타운 고스트>(2005)에서 한국 사회의 재개발 문제를 비디오 아트로 다루더니, 더 나아가 아예 실제 고문 피해자와 그를 치유해줄 정신과 의사를 한 무대 위에 올리는 공연물 <불의 절벽 2>만들었다.
작품을 제작해 전시장에 거는 미술가의 고전적인 역할은 이제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여러 스태프의 역할을 조정하는 연출자의 역할로 이동하고 있다. 그 결과 작가 개인의 기량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사이의 협업을 통한 종합예술로 도약하곤 한다. 전시장 벽면에 붙어 있던 미술이 어느새 무대 위의 공연으로 변모하고, 미술가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기획과 연출을 도맡게 된 데에는 '대중 소통’이라는 화두를 구호 이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다.
뉴미디어를 도입해 동시대 사람들의 바람과 감동을 충족시키는 사이에 미술은 예전과는 다른 표정을 짓게 됐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현대미술을 오히려 더 어렵게 보이도록 하는 역설도 발생하지만 말이다.
반이정 ㅣ 미술평론가
dogstylist.com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 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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