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eBell
눈물의 기억
마침내 매캐한 바람을 일으키며 고속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대합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승차장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무심히 앉아있던 아버지와 나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 속으로 걸어갔다. 그 날의 태양은 왜 그렇게 뜨거웠는지, 하마터면 난 좌석에 털썩 주저앉은 채 아버지의 존재를 잊을 뻔 했다. 다행히 녹슨 쇠를 긁는 듯한 시동 소리에 나도 모르게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의 아버지 모습은 그 이후로 내 기억의 수첩 속에 단단히 포스팅됐다. 그 때 아버지는 뒤돌아 서 있었고 -그렇기때문에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뒤돌아선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눈물을 참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혹여 아들이 볼까봐 저어하는 그이의 슬픈 몸뚱이를 뒤로 한 채 버스는 그렇게 논산을
향해 출발했다.
내가 추억하는‘ 훈련소로 가던 날’의 이미지는 대충 이렇다. 아버지는 겨울바람처럼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어머니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본 건 평생 딱 한 번뿐이었다고 한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나를 품에 안으신 채 눈물을 보이셨단다. 조실부모 하고 마흔이 다 돼서야 결혼하고 얻은 아들이니 그 감회가 남달랐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그 깊은 눈물의 곡절이야 누가 알겠는가! 반면에 어머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의 여왕이었다. 그날 고속버스 터미널에 못나온 것도 그걸 잘 아는 식구들의 만류가 간곡했기때문이었다. 강부자가 울면 강부자 따라 울고, 고두심이 불쌍하면 고두심이 불쌍하다고 운다. 참으로 드라마 작가들에겐 고마운 손님이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에 어머니는, 아니 이 여든 가까운 할머니는 그 금지옥엽 같던 손자, 그러니까 내 아들 녀석을 군대에 보냈다. 눈물의 여왕답게 몇날 며칠을 손자 생각에 주르륵 주르륵 눈물로 지새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엊그제는 기진맥진 몸져누우셨다. 다정도 정말 병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불행하게도(?) 난 어머니의 눈물샘을 물려받았다. 남자라는 억압 때문에 타인의 눈을 이리저리 피할 뿐이지-사실 이 부분에서 난 상당한 테크닉을 보유하고 있다-어릴 때부터 수컷의 기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사춘기때는 그게 싫어 일부러 욕을 가까이하면서 거친 남자의 이미지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다. 그렇게 한다고 호박이 수박될 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미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남자는 한 달에 1.4회, 여자는 5.3회 운다고 하니 눈물이 많은 것은 확실히 여자의 성징인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보통 화학적 눈물의 98%가 물로 구성돼 있는 데 비해 슬퍼서 흘리는 정서적 눈물 속에는 다량의 독소가 포함돼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보면 눈물을 펑펑 쏟고 난 후 찾아오는 일종의 카타르시스 혹은 마음의 평화는 과학적으로도 꽤나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눈물을 쏟는다는 것은 결국 체내의 독소를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치료과정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한 달에 4배 정도 독소를 더 방출시키는 여자들이 남자보다 오래 사는 건 당연한 사실이 아닐까. 결국, 여성의 자기치유 메커니즘이 훨씬 정교하다는 뜻일진대, 그녀들의 생물학적 완성도에 늘 경의를 표하게 된다. 어쨌든 눈물은 참으면 독이 되나니, 남자들이여 이불 속에서라도 마음껏 눈물을 흘리시라.
그나저나 더운데 훈련은 잘 받고 있는지. 남자 되라고 군대 보내놓고 외려 내가 애비가 되어가고 있으니...TT
이현종
CCO(Chief Creative Officer) | jjongcd@hs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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