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06 : 너는 어떻게 카피가 됐니? - 15초는 짧고, 20초는 길다 ①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너는 어떻게 카피가 됐니? 
15초는 짧고, 20초는 길다 ①

예나 지금이나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떻게 하면 카피라이터가 돼요?”다. 카피는 실무를 하면서 카피로 크는 거란 말을 수도 없이 하지만, 그래도 뭔가 방법이 따로 있지 않을까 계속 묻는다. 어떻게 하든 들어만 간다면 카피로 크는 길에 들어선다. 어떻게 클까?  여기 어리버리한 여자 카피라이터가 광고회사에 신입으로 들어가,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전설의 카피라이터 신입교육을 받으며 커가는 과정을 소소하게 풀어본다.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다. 팀 회의가 끝난 후 그날 할 일을 체크하기 위해 선배를 찾았다. 칼 같이 자리에 있던 선배가 없다. ‘혹시 내가 모르는 녹음이? 혹시 내가 깜박한 보고가? 혹시 내가 겁을 상실해서 잊어 먹는 회!의!가!’
만약 회의라면, 내는 내는 죽.었.다. 패닉 상태에서 멍~ 때리던 것도 잠시. 층층이 찾아 나섰다. 자료실·회의실·1층 매점까지 다 찾았지만 없다. 지나가던 다른 팀의 선배가 툭 던진 한 마디. “퇴근 했나?”‘ 오잉? 퇴근. 그래, 선배는 그럴 수 있어. 제발 퇴근했어라. 나도 좀 쉬게!!!’ 얼굴에 이런 불순한 생각이 보였는지 옆 팀 선배 왈.“ 아구, 도망갈 궁리만. A/V룸에 있을 거다. 얼릉 가봐라.” 아니 PD도 아니면서 A/V룸엔 웬일로.

PD의 롤을 알아야 카피도 잘 쓴다

A/V룸에 가니 선배가 OTTO 테이프를 보고 있다. 늦게 왔다고 한 잔소리 들은 나. 선배님, 저한테 여기 오라고 한 적 없거든요. 내가 왜 혼나야 합니까? 이렇게 말하고픈 마음은 굴뚝이지만 일단 살고 봐야지. 무조건 죄송합니다.
말이 짧은 선배님께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신다.“ 이제, CF 카피를 써야지. 자 카피 쓰자” 한 후 바람 같은 속도로 룸 안의 각종 기기들의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여기엔 VHS 테이프를 넣고 모니터를 켠다, 이쪽부터 플레이·리와인드·스톱 등등 버튼이다. 요것이 죠그셔틀. 왼쪽 오른쪽으로 돌리면 된다. 저쪽은 유메틱 테이프 보는 화면이다. 뒤에 보면 선이 많지(3번 기계), 번호대로 선을 연결하면 이렇게 저렇게 돼서 테이프가 변환된다. 서로 녹화도 된다.”‘ 블라블라~~~블라블라. 선배님 대체 무슨 말씀인지 도통 접수가 안 됩니다. 혹시, 불어를 하고 계시나요? 이 기계와 카피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요.’ 이해가 안 되는 말을 다 끝낸 후 선배는 룸을 나갔다.“ 오늘은 다른 나라 CF들 다 보고 나와. 내가 골라놨으니까. 한 4시면 다 볼 거다. 난 간다.” 그날 나는 토 나올 때까지 A/V룸에 갇혀 있었다. 당시 선배는 카피라이터도 PD의 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더 좋은 카피를 쓸 수 있다는 철학을 갖고 계셨다. 따로 PD가 있는 데도 스스로 러프 콘티를 그리기까지 했으니. 카피는 한 줄도 못 쓰면서 각종 기계장치를 다루는 연습만 죽어라 했다.


<Audio/Video Room>의 기본 장비들.
왼쪽부터 1.`전체 / 2.`컨트롤러 / 3.`테이프 변환과 시청을 위해 각종 선을 꽂거나 레코딩하는 기계

베끼고 베끼고 베끼고 Copy Book
CF 카피를 배우는 다음 스텝. CF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워낙 강조를 하니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간단하다. 아침에 출근할 때 중앙 일간지 3개, 스포츠지 2개를 사온다. 자료실에 올라가 베이시스 넷에 접속해 가장 최근에 방송된 CF의 카피를 프린트 해온다. 5개 신문 광고의 헤드라인을 베낀다. 똑같이. CF 카피도 베낀다. 똑같이. 다 베껴 쓴 후 선배한테 검사 받는다. 대리 때까지 하라는 엄명과 함께. 사원부터 차장까지 모은 카피가 두꺼운 스프링 노트로 17권이 넘는다. 죽어라 하기 싫었는데...  카피 커닝 북으로 아주 요긴하게 썼고, 쓰고 있다. 선배의 말은 옳다! 절대적으로 옳다! 들어서 나쁠 것 없다. 자료는 생명이다.


<심 카피의 Copy Book>

PT에서 배우는 CF 카피
5시도 되기 전에 선배가 부른다.“ 퇴근해라.”“ 네?”“ 퇴근해라.”“ 네? 제가 요즘 귀를 못 후볐더니 헛소리가 들립니다, 선배. 다시 한 번~ “퇴근!” 부르르 떨었다. 퇴근이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 퇴근이라니.아차, 좋아하면 안 된다. 이유를 알아야 하느니라, 이유를.“ 어인 일로 이리 이른 시간에 퇴근을....”“ 응, 별 거 아냐. 내일부터 팍스 PT야. 앞으로 매일 날밤 깔 거잖아. 그러니 오늘은 들어가. 들어가서 집 청소, 빨래 다 해라. 낼 부터 못 할 거다.” 으이그~ 밉상. 예나 지금이다 PT의 꽃은 TV-CF! 카피라이터들은 강력한(?) 키워드를 뽑아내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부터 세탁세제 팍스를 예로 들어 이야기를 풀어가겠다. 최근 2~3년 내의 팍스 광고와 경쟁 브랜드를 베이시스 넷에서 찾아낸다. 세탁세제이니 관계제품인 세탁기 광고도 본다. 그 후에 각각의 브랜드별로 헤드라인·키비주얼·모델 등을 각각의 시기별로 정리한다. A3 용지에 정리하다 보면 세탁세제에 사용되는 카피들의 특성이 보인다. 아무리 초짜라도! 브랜드별로 시기별로 정리하다 보면 A3지가 산처럼(거짓말 보태서) 쌓인다. 절대 컴퓨터로는 안 하니, 하나하나 손으로 쓰면 힘들어 미치고 팔짝 뛴다. 신기하게도 정리하다 보면 이런 저런 아이디어도 생각난다. 심지어 멋진 슬로건도(혼자만의 착각)떠오른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뭘 어떻게 할지 모르는 초짜한테는 훌륭한 교습법이다.


<세탁세제와 연관 제품인 세탁기 광고 정리 예>
본래는 세탁세제 카피를 정리한 샘플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려, 세탁기 광고를 정리한 샘플을 예로 들어 드립니다)


정리! 정리! 정리의 미학
카피를 정리하고 나면 다음 정리가 나를 기다린다. 참, 선배는 하지말라는 것도 하라는 것도 많다. 정리한 카피를 그래프화하란다. 뭣이야! 이런, 내가 정리 girl이람.‘ 카피 쓰고 싶어~궁시렁 궁시렁~하자! 하자! 어쩌겠느냐~ 어째~.’
그래프도 단계가 있다. 먼저, 브랜드별로 나눈다. X축과 Y축을 나눈다. X축은 연도와 모델·키워드를 정리하고 Y축은 시장 점유율을 표시한다. 때로는 Y축이 매체량이 되는 경우도 있다. 브랜드별로 그래프가 정리되면 하나로 합체!! 이쯤 되면 나름 그래프를 그리는 노하우도 갖게 된다. 색을 다르게, 위치도 알맞게 배분한다. 그럼 세제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한눈에? 한 스푼? 흐흐흐~ 나름 머릿속으로 방향도 세우게 된다. 누가 잘했는지, 뭐가 좋았는지가 보이니 괴발개발(?)이래도 한 방향은 건진다. 심지어는 잘못 봐서 엉뚱하게 베껴놓은 카피를 모르는 척 키워드로 내놓기도 한다.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요!


<한스푼 그래프> <팍스 그래프> <비트 그래프> <합체 그래프 > <팍스 확대>


카피 플랫폼
다음은 카피 플랫폼 작성. 왼쪽과 오른쪽으로 칸을 나눈다. 왼쪽에는 세탁이 잘 되어 소비자가 얻게 되는 이득과 이점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한다. 최대한 소비자 언어로! 중간에 생각이 끊기면 자료실로 올라가 여성지를 들고 내려온다.
아줌마들이 빨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찾아본다. 그것도 다 썼으면 집에 계신 어머니가 평상시에 했던 말을 쭉 써본다. 열에 아홉, 아니 열 개는 잔소리다. 더 이상 쓸 것이 없다. 그렇다고 냉큼 선배에게 가져가면, 냉큼 말하신다.“ 더 써와야지. 아직 시간 많아.” 그러면서 비장의 무기를 들이미신다.“ 섭섭아~ 자기야~~ 더” ‘미치겠다. 더 쓴다고요, 더 써요?’ 이 단계에 들어가면 상상을 한다. 결혼한 친구, 결혼한 언니·이모·고모 등등이 되어 본다. 그럼 또 찾아진다. 말이 되던 안 되던. 왼쪽이 일정 수준 정리되면 오른쪽을 메워간다. 처음엔 진도가 잘 나간다. 몇 개 넘어가면 정말 빈칸이 한없이 넓다. 한 줄 한 줄 메워가는 것이 고문이다. 소비자의 이점을 팍스의 언어로! 말이 쉽지. 머리카락 다 빠진다. 나중에 보면 팍스만의 이점이라고는‘ 팍’이란 단어가 들어가서 세정력을 강조한 것만 주르르. 이걸 들고 가서 선배를 보여줘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더는 못해!’ 이러다 또 쓰고‘ 더는 못해!’ 이러다 또 쓰고 몇 번을 반복하다 마침내‘ 나 그냥 죽을래~’ 선배에게 쪼르르 달려가 내놓는다. 앗! 회의실로 부른다. 그럼 이 작업은 끝이라는 이야기. 다섯 장의 카피 플랫폼을(5장을 A4지라고 생각하면 노!노! A3 다섯 장이다) 쓰윽 스리슬쩍 보고서는 몇 개를 골라준다. 이래저래해서 요것 저것이 좋다. 그걸 살려서 카피를 쓰란다.

<카피 플랫폼> <카피 플랫폼 확대>


비형식의 카피와 형식의 카피
지금처럼 한 사람당 노트북 한 대가 아닌, 팀마다 배당된 PC와 매킨토시가 따로 있던 상황에서 카피를 컴퓨터로 쓴다는 건 어불성설. 종이에 펜으로 열심히 아이데이션 카피를 정리한다. 비주얼은 당근 없다. 촛수에 상관없이 길게 길게 쓴다. 생각의 폭을 넓히라는 선배의 살뜰한 조언을 따라 상상의 나래를 쭈~욱 펼쳐본다. 정리해서 가져가면, 이 순간부터는 아무 말도 없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하나하나 그어 내리는데… 눈물이 난다. ‘어떻게 한 건데. 아니, 이 좋은 아이디어를!’
전체 중에 한 개를 건질까 말까 한다. 세 번 정도 반복. 그런 후에 선택된 카피는 형식을 갖춘 카피로 다시 정리된다. 나는 워드프로그램을 잘 못 쓰는 카피 축에 속한다. 나이 때문? 천만에! 선배 때문. 선배는 엘렉스컴퓨터(지금의 매킨토시 한국 총판) 담당 카피라이터였다. 당연히 카피를 매킨토시로 쓴다. 후배인 나는? 선배를 따라 매킨토시를 썼다. 역시, 속으로는‘ 선배, 나 카피야. 매킨토시 몰라. 표까지 만들어야 한다고요~’
끽 소리 한 번 못하고 Quark으로 카피 작업을 했다. 맨 위에는 제목을, 왼쪽에는 Video, 오른쪽은 Audio를. 선택된 카피 하나에 하나만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하니(난, 생각이 싫었다. 자장면이 좋았다♬)
‘다양하게’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따라서. 힘든 과정이지만 생각의 폭을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넓히기는 좋다. 찰랑찰랑, 깊이는 발목에도 안 닿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정리된 카피는 팀 아이데이션 회의 때 가져간다.“ 신입은 팀장이 기대 안 한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해라.” 마라톤 회의동안 막내 카피는 언제나 서기를 담당한다. 팀의 서기로서의 임무는 회의 종료 후 팀원 숫자대로 복사, 책상 위에 올려놓아야 끝! 다음 회의를 위해 비형식의 카피와 형식의 카피를 또 반복한다. 카피만 반복한다면 행복한 시간. PD 선배를 따라 A/V룸에 들어간다.
세탁세제. 세제다. 해외 CF를 뒤져 세정력과 관계된 동영상을 찾아야 한다.‘ 내가 할 일이 아니야.’ 그렇게 투덜거린다(물론 이 타이밍에서도 속으로만!) 것도 잠시. 전투적으로 신나게 찾는다. 찾다 보면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카피도 생각나고. 필요한 과정이지, 내가 할 필요 없는 일이 아니다, 그럼. 헤헤거리며 PD 선배에게 커피도 서비스한다. 사람이 참 간사하긴 간사하다.


방향이 결정된 후, 카피는 직급이 없다
몇 번의 회의 끝, 방향과 안이 결정되면 카피라이터들은 카피라이팅에 들어간다. 국장님의 진두지휘 아래 국장님이 주신 가이드라인을 따라 직급 상관없이 카피를 쓴다. 내 카피를 프로젝트 리더에게 적극적으로 팔 기회이기도 하지만, 만천하에 카피 실력이 보이게 되는 때다. 다들 이런 때를 겪으리라. 긴장하지 마라. 긴장한다고 못 쓴 카피가 환골탈태해서 순간 다이아몬드처럼 빛날 일은 없다. 있는 그대로 욕.심.내.서. 쓰면 된다.
보통의 세제광고는 세척력과 브랜드 네임을 남기려고만 했다. 잘 빨리면 되는 것이다. 이런 안일한 전략이 통하는 시기였다. 당시 프로젝트 리더는 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르게 가져갔다. 우리나라 주부들은 세탁기로 세탁을 하면 때가 잘 안 빠진다는 생각이 뿌리 깊은 상황. 컨셉트를‘ 세제는 좋지만 세탁기가 나빠서 때가 잘 안 빠진다’로 잡았다.‘ 세탁기가 나빠도 때가 팍팍 빠지는 세제’로 포지셔닝시키는 전략. 팀에 있는 3명의 카피는 녹음하는 순간까지 카피를 썼다. 프로젝트 리더까지 4명이 하루에 한 번 또는 두 번 회의실에 모인다. 서로가 쓴 카피 중에 단어 하나, 전개 방법 하나하나 신중하게 짚어간다.
그 중에서 새로움을 주는 카피. 전개 방법이 뻔하지 않은 카피를 찾고 또 찾는다. 막내라서 녹음실과 편집실은 못 갔지만 그곳에서도 계속 카피를 바꾸었다고 한다.


심의섭
Chie Copy | adel@hsad.co.kr 

나를 사랑하기가 제일 어렵다. 특히, 크리에이터들은.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