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10 : SUDDENBIRTH - 뒷담화와 음모론은 무슨 차이?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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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담화와 음모론은 무슨 차이?

누군가는 말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두 가지가 있다고. 진실 혹은 음모. 때론 유치찬란한 음모론도 지나치지 못하는 걸 보면 그 진실게임 안에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묘한 중독성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흠〜 뛰어난 상상력에 문학적 구조까지!
음모론을 얘기할 때 누구나 한 번쯤은 떠올리게 되는 몇 가지의 대표 레퍼토리가 있다. 복잡다단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책과 영화로 전 세계에 종교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다빈치 코드>, 미국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던 9·11테러,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신종플루를 일부러 퍼뜨렸다는 신종플루 음모론, 다이애나 비의 죽음에 관한 영국 왕실 개입설 등이 그 대표적인 예.
이런 음모론은 물론 국내에도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이순신 장군이 사실은 노량진해전 때 죽은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와 최근의 천안함 사태에 얽힌 각종 루머들까지 음모론은 국경과 역사와 대상을 초월해 늘 탄생과 소멸을 반복한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루머 수준에 그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고 정교하게 세팅된, 그래서 설마 하는 마음을 안고서도 허무맹랑해 보이는 스토리에 사리살짝 홀려버리고 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채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음모론들의 공통점은 주장하는 논지 자체가 나름대로의 '팩트'에 근거한다는 사실이며, 대부분이 간과하거나 무시했던 뜻밖의 사실들을 찾아낸 후 상상력이라는 풀을 먹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날줄과 씨줄로 교묘하게 엮어낸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찾아낸 ‘증험’들을 하나둘 꺼내 보이며 개인적 견해를 동시대적 ‘론(論)’으로까지 확장시킨다.
한데 음모론들의 구조를 찬찬히 뜯어보면 이것이 문학적 구조와 매우 닮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들은 관심 갖지 않았던 픽션의 재료들을 모아 플롯이라는 뼈대를 입히고 상상력이라는 맛깔난 양념으로 버무려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달하는 문학적 방법론. 현실의 이야기보다 더 현실 같은 흡입력으로 독자를 감정이입시키는 문학의 가공할 힘을 생각한다면 갖가지 음모론이 어떻게 사람들을 홀리고 역사와 진실의 강에 적잖은 파란을 일으킬 수 있는지, 그 뜻밖의 힘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한 단서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 <다빈치코드>                   9·11테러 전과 후                            Mathias Broeckers저 <음모론>  영화 <방자전>  

재미있으면서 무서운 결말, “아니면 말고!”
음모론의 가장 훌륭한 미덕이자 끔찍한 폐단은 단지 세간의 관심을 끌기 위한 ‘낚시’이든, 기존 상황을 뒤엎고자 온갖 시간과 공을 들여 완성해낸 항거적 반전 시나리오든 그것을 해석하고 재단하는 것은 철저히 각자의 몫이라는 점에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네버 엔딩 스토리가 되는 이유다. 모든 음모론이 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지어낸 집요한 추리와 상상력의 산물만은 아니다. 그러니 더욱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O·X 중 어느 것을 들어주느냐 하는 해석의 주체가 중요해진다.
실제로 한 역사나 대상에 대한 음모론이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가장 다채로운(?) 음모론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정치권과 연예계다. 온갖 음모론의 포화 끝에 황공한 감투를 쓰기 직전의 정치인을 단죄하기도 하는 청문회 자리가 그렇고, 놀라운 정보력으로 한 연예인의 비리 섞인 과거 행적을 찾아 폭로하는 네티즌들의 공간이 그렇다. 법정까지 갈 정도로 치열한 공방전이 되기도 하는 이들 음모론의 끝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진실 아니면 거짓. 아니다. 음모론의 끝은 세 가지다. 진실과 거짓, 그리고 진실이나 거짓 어느 쪽으로도 결론날 수 없을 경우를 위한, ‘아니면 말고’의 결말. 음모론이 재미있으면서도 무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뒷담화와 음모론
음모론이 지니는 순기능이 예술적으로 발현된 경우도 있다. 영화 <방자전>. 고전 속 인물들과 그 안에 설정돼 있던 인간관계에 대한 발칙한 음모론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기존의 인물 캐릭터와 내러티브를 뒤집는 상상력의 즐거운 반전을 보여주었다. 원작인 <춘향전>을 텍스트 삼아 원하는 팩트와 에피소드만 취사선택한 후 치밀한 계산과 상상력으로 기존의 구조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이 작품은 고전에 대한 음모론이 예술적 크리에이티브로 이어진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음모론은 거대한 역사만을 재료로 삼지는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나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은 친구에 대해, 연인에 대해, 혹은 직접 연관도 없는 제 3자에 대해 무수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스스로 느끼기에도 정말 그럴싸한 것 같은 음모론들을 만들어 내거나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얘기에 뼈와 살을 더해 열심히 실어 나른다. 시쳇말로 하면 ‘뒷담화’고, 거창하게 포장하면 이 역시 음모론이다. 음모론이 황당한 루머로 끝나고 가끔 무고한 사람을 마녀사냥시킬 때도 있지만, 내면에 억눌려 있던 금지된 상상의 봉인을 풀고 잠시나마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와 신선한 충격을 만끽해볼 수 있는 비밀의 화원이 돼주는 건 아닐까?
어차피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 ‘이야기’가 빠질 수는 없고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날이 되어서야 음모론도 함께 끝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게 세상의 이치니까.


이승민
문화 칼럼니스트 |  brianlee04@naver.com

대학에서 문예창작학을 전공한 후 여성지에 청일점 에디터로 입문, 십 수 년을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현재는 프리랜서로 각종 매체에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실어 나르고 있으며, 매체 컨설턴트 및 카피라이터로도 활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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