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복싱데이’는 단순 이벤트성 세일이 아닌 거국적인 행사의 형태로 유통 소비재 산업 전체가 소비를 유도하고 창출해 냄으로써 하나의 문화이자 명절로 자리 잡았다.
효과적인 가격전략으로 경기불황의 위기를 이겨낸 최신 사례가 있다. 2009년 최악의 경기불황 속에서도 엄청난 성장을 보이며 유통업계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1파운드 스토어(One pound store)’ 산업과, 경기불황 극복의 터닝 포인트가 된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 및 복싱데이(Boxing day)의 쇼핑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파운드랜드
1파운드로 유명 브랜드를 산다
지난 몇 년 간을 통틀어 2009년은 유통업체(Retailers)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한 해라고 할 수 있었다. 경기침체로 소비자들의 지갑은 꽁꽁 얼어 있었고, 이는 현저한 매출감소로 이어졌다. 영국의 독보적인 유통 강자인 테스코(TESCO)의 경우 2.5%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 지난 15년 중 최악의 영업실적을 보였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성장을 보인 유통산업이 있다. 바로 저가 할인 스토어(Discount Retailers) 산업, 그 중에서도 '1파운드 스토어(1 pound store)' 산업이다. 2009년 9월 발표된 할인업체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2년 동안 1파운드 스토어 점포 수는 60%나 증가했으며, 경기불황의 악조건을 기회로 삼고 기존의 고객층을 벗어나 혁신적인 고객유치 전략으로 전례 없는 성장을 기록했다.
영국의 파운드랜드(Poundland)는 1990년 4월에 ‘모든 상품을 1파운드에 판매한다’는 모토로 설립되었다. 건강/미용 제품·가정용품·주방용품·식료품 등 3,000여 종 이상의 제품을 취급하는 이 회사는 지난 2008년도 회계결산을 통해 122%의 엄청난 성장을 기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2007년 360만 파운드(약 70억 원, 2010년 1월 환율 기준)의 순이익을 거둔 이래 1년 만에 무려 800만 파운드(약 150억 원)의 순이익으로 올라선 것이다. 파운드랜드의 성공전략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분석될 수 있겠지만,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은 역시 단일 가격 정책(single priced retailing)이라는 독특한 가격전략이다. 3,000여 종이 넘는 다양한 제품 군을 오직 1파운드로만 판매하니 가격에 대한 소비자의 접근성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매장은 시내 한복판에
하지만 이는 다른 저가 혹은 단일 가격 유통업체와 별반 다른 점이 없다. 그러면 파운드랜드의 조금 더 차별적인 전략은 무엇일까. 첫째, 파운드랜드는 ‘1파운드 스토어에서 파는 제품들은 가격이 싸기 때문에 질이 낮거나 믿을 수 없는 제품이 많다’는 기존의 선입견을 깨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파운드랜드에서 취급하는 3,000여 종의 제품 중 800여 품목은 유명 브랜드 제품이다. 유명하고 믿을 수 있는 업체들의 제품 역시 1파운드에 판매한다는 점이 소비자의 소비심리를 자극했다. 파운드랜드는 유명 브랜드 업체뿐만 아니라 모든 공급업체들과의 긴밀하고 신뢰성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약간의 포장 손상 등으로 고급 점포에 판매가 리콜된 제품들, 대량구매를 통한 값싼 가격, 재고처리에 대한 기여 등으로 독점적인 유통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둘째, 이러한 가격 및 품질 유지 정책은 경기불황에 들어와 더욱 빛이 발하게 된다. 소비자층이 점점 확대되기 때문이다. 기존 파운드랜드 매출의 90% 이상이 저소득층(C1, C2, D, E 카테고리)에 의해 발생했는데, 이는 저가정책의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경제위기에 들어서면서 부유층과 중산층(A/B 카테고리)의 구매 비율이 매년 20%씩 증가됐다.
마지막으로, 파운드랜드는 단일 가격 정책에 위치전략(Location Strategy)을 접목했다. 경쟁업체들이 고정비용을 이유로 시내 구석이나 외곽에 위치한 것과 달리 파운드랜드는 시내 중심, 대형 쇼핑몰 및 백화점 입점을 고수했다. 다른 소매점이나 대형 체인점들이 경기불황을 이유로 떠나가거나 도산하는 바람에 남겨진 시내 중심의 점포들을 모두 매입해 진출한 것이다.
복싱데이 (Boxing Day)
12월 26일, 70% 이상 할인판매
‘복싱데이(Boxing Day)’는 영국·호주·뉴질랜드·캐나다·네덜란드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과 홍콩 등 과거 영연방 국가들의 ‘크리스마스 연말 공휴일’을 뜻하는 말이다. 지금은 영연방 세력의 규모가 축소되고 한정되어 있는 만큼 복싱데이에 대한 다른 나라의 풍습은 제각각이지만, 현재 영국에서의 복싱데이는 ‘세일의 날’로서 소비자나 기업들에게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영국에서는 정확히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 바로 복싱데이다.
복싱데이가 영국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세일을 실시하기 때문이다. 12월 26일에 실시되는 세일의 규모는 가히 상상을 넘어선다(사실 복싱데이를 기준으로 앞뒤로 몇 주 더 세일이 실시되지만 당일의 물량과 규모는 따라갈 수 없다). 기존의 중저가 상품에 대한 세일은 물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명품 브랜드의 제품들도 대대적인 세일에 들어간다. 세일이라고 해서 10% 혹은 30% 정도의 세일이 아니다. 50% 미만은 세일의 경쟁력에 포함되지도 못한다. 70%, 많으면 90% 세일도 즐비하며, Buy 1 Get 1 Free(하나 구입하면 하나 더), 2 For 3 (2개 가격에 3개), 전 품목 50%에 추가 20% 같은 공격적인 가격 프로모션이 즐비하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사고 싶은 물건을 생각해 두었다가 12월 26일 새벽부터 원하는 매장 앞에 줄을 선다. 조금만 늦어도 원하는 제품은 동이 나 버린다. 쇼핑 거리에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점심 무렵이 되기도 전에 매장 진열대는 텅텅 비어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은 기업 입장에서는 단연 최고의 이슈다. 일례로 테스코(Tesco)는 지난 크리스마스 시즌 및 복싱데이에 최근 3년 중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는 발표를 했다. 2008년 대비 35% 증가를 보인 것으로 15년 중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는 테스코도 연말 시즌 성공만으로 위기를 넘기고 불황을 타개했다는 긍정적인 평가 일색이다.
국가적 명절 같은 소비축제
여기까지만 보면 세일의 규모만 조금 더 클 뿐 우리나라의 연말 세일, 신학기 세일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복싱데이의 파워와 매력은 남다르다. 소비자들이 아침부터 극성을 부리며 줄을 서는 현상은 아무래도 식료품 같은 일상재보다는 의류나 신발 같은 패션소비재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더욱이 복싱데이에 파격적으로 판매하는 제품들은 이월상품이나 재고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재고처리나 이월상품 판매를 목적으로 백화점이나 할인매장의 한 쪽 또는 정문 앞 임시 매장을 꾸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영국 복싱데이는 ‘그 해 신상품은 그 해 다 팔고 지나간다’는 경향이 강하다. 가격전략 측면에서 분석해보면 복싱데이는 엄청난 경제적 혜택을 불러온다.
첫째, 기업 입장에서는 재고유지 비용 감소효과를 창출한다. 특히 의류나 신발 등 패션 분야나 명품 사치재 분야에서는 해가 지나가면 판매율이 감소하는 제품들을 즉각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둘째, 엄청나게 빠른 현대의 유행에 즉각적인 대처가 가능하게 해준다. 신상품의 빠른 도입으로 소비자의 변화하는 취향을 바로 반영할 수 있다. 셋째, 극단적인 세일에도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주지 않는다. 복싱데이는 연례행사로서 오랜 기간 동안 국가적인 쇼핑데이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50%가 넘는 세일을 통해 실질적인 이윤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지만 원가대비 마진율이 굉장히 큰 패션재 같은 경우는 최소한의 마진을 남길 수 있고, 대량판매와 재고 절감 등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또한 대대적인 판매를 통해 현금유동성을 크게 높일 수 있어 특히 요즘 같은 불황기에 톡톡한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파운드랜드의 경우 단일 가격 정책이라는 평범한 전략을 가지면서도 우수한 브랜드 유지, 소비자 확장 정책, 쇼핑 중심가 위치 선정을 통한 기업 브랜드 이미지 형성 등의 복합적인 마케팅 전략을 통해 가격전략을 중심으로 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 냈다. 복싱데이 역시 단순 이벤트 성 세일이 아닌 거국적인 행사의 형태로 유통 소비재 산업 전체가 소비를 유도하고 창출해 냄으로써 하나의 문화이자 명절로 자리 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