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6.
나는 연필을 깎는다. 고로 존재한다.
연필을 깎는다. 총탄 구멍처럼 생긴 홀에 연필을 넣고 고정시킨 다음 작은 손잡이를 돌리면 일 분도 안돼 연필은 깔끔하게 면도를 마친 신사의 얼굴로 변신한다. 백미는 완벽한 원뿔 모양의 끝자락에 길지도 짧지도 않은 흑연 심이 예리하게 탄생할 때다. 새로이 태어난 흑단의 예각 위로 흐르는 빛은 자못 비장하다. 마침내 마지막 연필을 깎고 여느 날처럼 가지런히 놓으면 순례자의 시간이 시작된다. 다시 언어의 숲이다. 카피라이터로서 나의 아침은 연필을 깎는 일부터 시작된다. 처음 카피라이터에 입문했을 때는 주로 카피 용지에 볼펜이나 만년필로 써서 넘기거나 아니면 전동타자기를 사용하면 되었다(전동타자기는 광고국마다 한 대씩 배치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PC의 시대가 오면서 점점 필기도구와 멀어지게 되었는데, 나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