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08 : Special Edition - LG애드 창립 20주년 특집 - 4. 연대별 성장기/ 창립이전기/LG애드/ Re-birth LG애드
2010.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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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의 광고활동 : 국내에 광고개념 전파 역할 톡톡 그런데 1960년대 들어서면서 도입한 민간 상업방송은 전파 미디어의 위력을 보여주면서 명실상부한 매스 미디어·매스 커뮤니케이션 시대로의 발전을 촉발시켰다. 이는 특히 금성사가 1959년에 국내 최초로 개발한 라디오를 시발점으로 하는데, 이러한 국산 라디오의 출현은 방송은 물론 광고산업 발전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60년대의 광고활동 : 그룹 광고 업무의 단초 마련 1960년대에 들어 정식 조직은 아니었지만 락희화학 서울사무소에서 락희화학·락희유지·금성사 광고담당자들이 모여 상호 협의하는 그룹 광고 성격의 업무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이어 1962년 11월 락희화학 서울사무소에 정식으로 선전실이 만들어져 각 사의 광고담당자들이 광고기획 및 매체 집행, 광고 디자인 등으로 역할을 나누어 수행하면서 락희화학·락희유지·락희비니루·금성사·반도상사 등의 광고업무를 일괄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직은 1965년에 선전실장이 임명되면서 총 6명의 직원이 각각의 역할을 나눈, 최초의 락희화학 광고업무 담당기구로 발전하였다. 70년대의 광고활동 : 광고대행사 체제로의 기반 구축 한편, 1970년대 한국 경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지속적인 추진과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두 자릿수를 웃도는 GNP 성장을 이룩했다. 또한 1977년 수출액 100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되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광고 분야 또한 이러한 성장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1970년 GNP의 0.47%(127억 원) 규모였던 광고비가 1978년에는 무려 13배가 넘는 0.79%(1,699억 원) 규모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다. 또한 업종별 다변화도 이루어져, 60년대 제약업과 식품업 등이 주도해오던 주 광고 업종이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자·자동차·기계·식품·섬유·화장품 등으로 확대되었다. 아울러 1971년 범汎)광고인의 모임인 ‘한국광고업협회’가 설립되는 한편, 각종 광고상 제도가 제정되면서 새로운 광고문화 정착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미디어 분야에서는 흑백TV가 절대적인 대중매체로 자리잡으면서 컬러방송으로 전환되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이를 견제하기 위해 신문도 컬러인쇄를 확대하고 지면 증면에 나서는 등 미디어 시장도 광고산업 발전과 함께 확대·발전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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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이전의 광고활동 : 독립광고회사로의 발돋움 채비 이에따라 1980년대 초반, 희성산업은 독립 에이전시로 나아가기 위한 체제 확립과 그룹의 해외광고 강화,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는 효율성 제고를 내세우는 한편, 1982년 광고부문에 팀 운영제도를 도입하고 업무전산화 추진 계획을 확정했다. 또 광고부문의 선진 기법 도입을 위해 외국 광고회사와의 제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조직의 전문화를 꾀하는 등 독립광고회사 탄생의 토대를 다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광고자료의 발간, 리뷰 제도의 활성화, 광고 워크숍 개최, 광고경진대회 실시, 외부 광고주의 마케팅 조사 등에 주력하는 등 광고 기능의 전문적 확대를 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드디어 1984년 광고사업부를 별도 법인체인 ㈜엘지애드로 독립시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희성산업은 1980년 연암 구인회 럭키금성 창업회장의 창업정신과 그룹의 성장 및 경제 발전에 기여한 업적을 기리고, 이를 그룹 임직원과 대외에 인식시킴으로써 그룹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부산에 연암기념관을 건립하면서 전시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이어서 1982년에는 건국 이래 최초의 국제박람회인 ’82 서울국제무역박람회(SITRA ’82)에 참여한 럭키그룹관의 기획 및 제작, 운영을 담당하는 등 전시사업을 확대하게 된다. | ||||||||||
LG애드의 창립과 정착 럭키금성의 광고 부문은 1962년 11월 락희화학 선전실로 발족한 이래 20여 년 동안 국내 광고산업의 토양을 일구어 오면서 우리나라 광고업계의 발전과 성장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다. 또 이 과정에서 축적된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광고사업을 보다 전문화시키기 위해 1978년 희성산업을 당시 럭키그룹의 홍보 및 광고를 전담하는 전문광고회사로 개편하였고, 이를 계기로 희성산업은 국내 굴지의 하우스 에이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 ||
독립광고회사 잇따른 설립으로 경쟁 심화 이 같은 광고회사의 설립 붐은 기존 자체 사업부 조직으로는 전문화된 광고회사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힘들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는데, 당시 그룹 단위로 발전해나가는 우리 기업의 특성상 광고대행을 의뢰할 적합한 광고대행사의 선정이 어렵다는 데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당시 희성산업은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출범과 함께 변화한 방송광고시장에서 독립된 광고전문회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매체대행 수수료를 받지 못하는 돌발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국신문협회 광고협의회의 신문광고 대행자격 인증에도 불구하고 광고매체의 큰 축인 방송광고를 원활하게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종합광고 기능을 수행하는 데 제동이 걸린 것이다. 또 구조적으로도 광고산업의 전문화·국제화에 따라 경쟁력 유지 및 강화를 위해서는 광고 관련 전문인력의 확보가 최우선 과제였으나, 기존 하우스 에이전시 체제로는 독립광고대행사에 비해 여러 모로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83년부터 광고회사의 신설 및 경쟁력 강화 방안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시작되었는데, 그 해결방안으로 ‘첫째, 독립된 광고대행사의 출범, 둘째, 현 체제를 유지하고 보강하는 방법, 셋째, 광고업무를 이전처럼 그룹 내 각 사로 분산’ 등의 세 가지 검토안이 제시되었다. 이에 광고산업의 중요성과 발전 추세에 비추어 볼 때 사업자체를 포기할 수 없으며, 또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전파광고 대행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별도의 독립광고회사를 신설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1960년대 이후 축적된 전통과 노하우야말로 그룹 이외의 다른 광고주들에게도 충분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최대의 강점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배경으로 회사 신설 결정이 내려졌다. 1984년 5월, 종합광고회사 설립이 결정됨에 따라 당시 럭키빌딩 15층 기획조정실 내에 창립사무소를 만드는 등 회사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우선 회사의 상호로 ㈜희성기획, (주)신성기획, ㈜애드인터내셔널, ㈜스타애드, ㈜코스모, ㈜크로바 등 다수 안이 제출되었으나 <주식회사 엘·지·애드(LG Ad Inc)>로 최종 결정되면서, LG브랜드를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어 5월 25일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고, 같은 달 30일 남대문로 5가 소재 국제화재보험빌딩에서 회사 창립총회를 가짐으로써 마침내 LG애드가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초대 사장으로는 변규칠 기조실 사장이 겸임을 하는 한편, 윤좌현 부사장 총괄 아래 관리담당 구자욱 이사, 광고담당 김문웅 이사 등의 임원진과 3본부 22부 13팀 7과의 조직을 갖추었으며, 인원은 총 142명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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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전문회사로의 토대 구축 LG애드는 독립광고회사로 출범한 이후 조속한 시기에 체제를 정비한다는 목표 아래 실무팀을 구성하고 장기 경영목표 및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 최우선 전략과제로는 ① 종합광고회사로서의 체제 정비 ② 외부 광고주 유치 ③ 국제화 추진 ④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전파광고 대행사 인정 획득 등을 설정했다. 이러한 성장은 곧 조직의 발전적 개편과 업무 역량 강화 노력으로 이어졌다. 우선 기존의 매체부를 전파매체를 담당하는 매체 1부와 인쇄매체를 담당하는 매체 2부로 확대하는 등 전파광고 대행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조직정비 작업을 착실히 준비해나갔다. 또한 광고 크리에이티브 역량 강화에도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건 물론이다. 광고 크리에이티브의 향상과 도전 의욕 고취를 목적으로 희성산업 당시부터 실시해온 홍보·광고경진대회는 LG애드 출범과 더불어 제6회 대회부터 그 명칭을 ‘LG애드 광고경진대회’로 바꾸어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 경진대회는 매년 말 회사 전임직원이 팀별로 조를 구성하고, 과제 광고로서 다음해 그룹광고안을 제작, 제출토록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또 1986년에는 LG애드 내 카피라이터의 자질 향상과 국내외 새로운 광고기법에 대한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하는 LG애드 카피연구회가 발족되었는데, 이 연구회에서는 매월 1회 정기 세미나 및 반기 1회의 합숙 워크숍 등을 펼치고 교육자료집을 발간하는 등 광고의 질적 수준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크리에이티브 향상을 위해 시행하는 제도 가운데 현재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는 단연 ‘CRB(Creative Review Board)’를 꼽을 수 있다. CRB는 객관적인 광고입안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광고제작물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며, 제작 부문의 자질 향상 및 개발의 동기를 부여한다는 취지 아래 1984년 5월부터 시행된 제도이다. 이는 LG애드가 기획·제작한 광고제작물을 매체에 노출시키기에 앞서 사전에 검토·평가하여 제작방향을 제시하거나 조언을 하기 위한 상설 회의기구로 운영되었는데, 위원은 광고담당 이사와 기획본부장 및 관련 전문가와 관리자로 구성되었다. 이를 통해 LG애드 광고제작물의 크리에이티브 향상과 광고주 만족도 제고에 기여한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으로, 그 성과는 1986년 제6회 한국방송광고대상의 대상(금성사 시력보호 TV), TV부문 최우수상(도투락만두), 라디오부문 우수상(럭키 하이크림 D 비누) 등의 수상 실적으로도 증명되었다. 더불어 창립 이듬해인 1985년에는 경제적·사회적 중요성에 비해 광고인들의 광고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하다는 인식 아래, 광고이론의 체계화와 새로운 광고정보의 전달을 통해 광고인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사보 <엘지애드>를 창간했다. 이러한 사보 발간을 통해 건전한 광고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광고주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간접적 커뮤니케이션채널 역할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사보 <엘지애드>는 특히 매월 광고업계 전반의 현안이나 새로운 광고이론, 그리고 선진 외국의 앞선 노하우 등을 시의 적절하게 주제로 선정하고 심층적으로 다룸으로써 국내에 부족했던 광고이론 체계화에도 기여해왔다. 아울러 당시 비중이 높아져 가는 마케팅과 매체기획·SP·PR 등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토털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의 실현이라는 회사의 비전을 실천하고 이를 전파하는 종합 커뮤니케이션 전문지로서 그 면모를 다져왔다. 이외에도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사원 복지제도의 확대와, 임직원 사이의 팀워크를 다지는 사내 프로그램도 동시에 진행했다. 1985년 1월 사원 복리후생제도 개선의 일환으로 장기근속자 포상 기준을 상향 조정하는 한편, 경조휴가 및 축의금 지급 기준을 개선했다. 또 회사 내 건전한 사풍 진작을 위해 사원들의 친목활동인 인포멀 그룹의 활동을 적극 지원, 테니스회·볼링회·야구회·사진회·축구회·낚시회 등을 통해 임직원들이 더욱 융화·단결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회사 설립 초기부터 시행한 이러한 사내 커뮤니케이션 활성화 지원책을 통해 단기간에 경쟁회사보다 높은 로열티를 유지하는 한편, 화기애애한 사내 분위기 조성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또 이런 비공식적 모임의 지원 외에도 매년 연말 전임직원이 참여하는 합숙 워크숍을 개최, 광고인의 미래, 조직구성원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는 가운데 팀워크 배양을 위한 트레이닝 프로그램과 단합의 시간을 가지며 내실을 다지기도 하였다. 한편, 출범 첫 해 LG애드의 취급액은 전년 실적 265억 원에 비해 51.3% 성장한 401억 원 규모를 기록하면서, 국내 최고 광고회사의 반열에 당당히 합류했다. 이후 1985년 극심한 경제침체로 광고산업이 위축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출범 3차년도를 맞아 ‘선진 86-행동과 능률의 해’라는 경영방침을 세우고 광고 크리에이티브 능력 배양과 내실경영을 위한 전사적 노력을 기울인 결과 다시 491억 원 이상의 취급액을 기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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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광고회사로 성장 (1987~1989) 그 실제적 효과도 커, 한국방송광고공사로부터 계열사 광고비의 5%, 비계열사 광고비의 7%에 해당하는 매체 대행 수수료를 확보하게 됨으로써 경영여건이 호전되었음은 물론, 그 동안 광고주로부터 받아오던 수수료를 받지 않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광고주 영입에도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창립 2년 반만에 전파광고 대행자격을 획득한 것은 LG애드 전임직원이 하나로 뭉쳐 이루어낸 초창기 회사 경영의 최대 성과로서, 이는 명실상부한 종합 광고회사로의 새 출발을 의미한다. LG애드는 이에 발맞춰 경영조직의 활성화와 광고주 서비스 강화를 목적으로 광고산업의 특성에 맞는 조직체로의 개편을 단행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설립 후 2년여 동안 유지해왔던 일반 회사의 직위 명칭인 과장·부장·본부장을 차장·부장·국장으로 변경하고, 국 단위 중심으로 업무 추진체계를 갖추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매체국과 제작지원국을 신설하는 등 조직을 6국 5부(실) 18팀 6과로 확대 개편했다. 1987년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 있는 해라고 볼 수 있다. 회사 설립 후 숙원사업이었던 전파광고 대행자격을 획득함은 물론, 연말에는 서울 마포구 공덕동 소재 럭키금성 마포빌딩으로 사옥을 이전하면서 LG애드 마포시대를 개막했기 때문이다. 이 사옥 입주 초기에는 총 17층 가운데 15~17층의 3개 층을 사용했다. 이로써 1989년 말까지 LG애드에 광고를 의뢰한 광고주는 그룹 내부 18개 사, 외부 45개 사 등 모두 63개에 달했다. 크리에이티브 능력 배양에 박차 한편, 광고기능을 전문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노력도 다양하게 이어졌다. 우선 1980년대 중반부터 복잡해진 시장상황과 다양해진 광고주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마케팅 부문의 강화가 추진되었다. 이에 1988년 4월 1일자로 단행된 조직개편을 통해 마케팅국과 마케팅부를 신설하고 광고의 과학화를 추진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9년 9월 광고제작물의 크리에이티브 향상과 광고효과 제고를 위한 시스템 ‘LATS(LG Advertising Test System)’를 개발했다. 광고물에 대한 사전·사후 조사시스템인 LATS는 LG애드가 제작한 광고물을 매체에 집행하거나 광고주에 시사하기 전에 커뮤니케이션 대상인 소비자 반응을 조사하여 최종 제작에 반영함으로써 광고효과의 제고를 도모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또 매체에 게재된 뒤에는 경쟁광고와 비교하여 그 효과를 사전에 측정해 봄으로써 새로운 광고활동에 참고하는 사전·사후조사로 나누어 시행되었다. 크리에이티브 혁신을 위해서는 전문인력의 보강에 중점을 두는 한편, 1987년 2월부터는 제작팀이라는 명칭 대신 크리에이티브팀이라는 조직명을 사용하면서 관련 부문 직원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키며 크리에이티브 혁신 의지를 표출했다. 이어 1989년 하반기부터는 LG애드가 제작·방영, 또는 게재한 광고물을 대상으로 우수 광고물을 선정, 포상하는 ‘LG애드 크리에이티브광고상(LGCA : LG Ad Creative Awards)’을 마련,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로 나누어 실시했다. 아울러 직무능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 해외연수 또한 활발하게 시행되었다. 연암사이언스홀 등으로 SP 사업 급성장 또 SP부문은 기존의 경험과 노하우를 기반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LG애드 SP팀은 럭키금성 그룹의 여러 전시관·기념관 건립 및 다양한 전시회 참가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이 분야에서 다른 경쟁사보다 한발 앞선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해왔다. 특히 1986년 건립에 착수하여 1987년 럭키금성 트윈타워 준공과 함께 개관한 연암사이언스홀의 기획·시공·전시·운영 경험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연암사이언스홀 관련 진행 업무는 미래의 역군이 될 초·중·고등학생들에게 럭키금성의 첨단 과학기술을 알리고, 이를 통해 미래에의 꿈과 비전을 심어준다는 목표로 추진된 국내 최초의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또 오리온 초코파이·오리엔트 시계 이벤트 등 SP부문 최초로 외부 광고주를 유치하는 성과를 거두는 가운데, 판촉물의 기획·제작, LED(Light Emitting Diod)를 이용한 부산시 지하철 행선지 안내 게시기 설치 및 이벤트 부문 진출 등을 통해 사업영역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와 함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노력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창립 5년을 맞는 1988년, 대학생들에게 광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고 광고산업에 대한 호의도를 증진시키려는 취지로 ‘대학생 광고대상 공모전’ 행사를 신설한 것도 그 하나였다. 이는 광고를 전공하거나 광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광고를 제작할 수 있는 실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산학협동의 장이 되고 있는데, 수상 학생들에게는 상금과 더불어 인턴사원으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등 전문 광고인 양성의 초석으로서도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한편, 전파광고 대행자격 획득과 광고주의 적극적인 유치, 크리에이티브의 지속적인 혁신, 마케팅 조직의 강화 등 부단한 성장과 새로운 노력의 결과 LG애드의 취급액 규모도 급등하게 되었다. 설립 첫 해 400억 원으로 시작한 취급액이 출범 6년 만에 1,000억 원을 돌파하면서 업계 2위 자리를 차지했다. 또 전체 광고비 중 TV광고비 비중이 증가하면서 전파광고 대행의 효과를 실감하게 되었다. |
No.1 TMC 2000’을 향한 변화와 혁신(1990~1994) 1990년대 우리나라 광고산업은 21세기를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출발했다. 그러한 가운데 광고시장 개방으로 인한 세계화·국제화의 물결과, 광고시장의 팽창에 따른 광고회사의 급증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인 변화의 흐름이었다. ‘최고의 종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회사’를 향한 변혁
제작 부문도 CD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크리에이티브 조직을 확대하는 등 No.1 크리에이티브 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90년 클리오(Clio)에서 일화 맥콜이 파이널리스트를, 뉴욕페스티벌 TV 컴퓨터그래픽 부문에서는 LG카드 크레디피아가 파이널리스트에 선정되는 등 해외광고제에서의 수상이 이어졌다. 이어서 1993년에는 럭키금성그룹의 고객시리즈 그룹광고가 한국소비자단체연합회가 선정한 ‘제1회 소비자가 뽑은 좋은 광고상’의 으뜸상을 수상하였고, 광고학회가 선정하는 TV부문 ‘올해의 광고’로 금성사 Z블랙브라운관 투우편이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1993년 2월, LG애드가 제작한 레고코리아 TV광고가 대만과 일본에 수출되어 현지 방송을 통해 방영되었고, 나이키 에어맥스 광고가 홍콩에 수출되는 등 글로벌 기업들로부터도 크리에이티브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 ||||
LG애드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기 위한 발걸음이 가속되면서 1990년대 초반부터 해외시장 개척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과거부터 유지해오던 일본의 덴츠, 미국의 BBDO 등과의 교류를 지속하는 한편, 1991년 동경지사를 시작으로 1995년 북경지사, 1996년 뉴욕지사, 1997년 두바이지사 등을 설립, 광고주의 해외 광고 마케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에 나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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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시련 조기 극복, 대통령 취임식 성공적 수행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은 IMF라는 경제적인 상황을 고려해 행사의 화려함보다는 정권 교체의 상징성과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희망의 새시대를 향한 국민적인 합일점을 이끌어 내는 데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러한 취임식의 성공적인 수행은 그 동안 정부나 지자체들이 독자적으로 수행해오던 행사들을 광고회사의 사업영역으로 확대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대통령이 직접 출연,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고 관광객 유치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회사가 제작한 CF가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를 통해 방영되면서 높은 호응을 얻어, IMF로 다소 주춤했던 국가이미지를 끌어올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첨단 전문 시스템의 독자적 개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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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탄생과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전(2002~2004) 1997년에 몰아친 IMF 구제금융의 여파는 새로운 세기를 넘어서면서도 계속 이어져, 1999년 이후 차츰 경제지표나 여건이 나아지고 있기는 했지만 체감경기는 예전만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LG애드는 어려운 외부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스스로 마련하자는 의미로 ‘새롭게 하자! New Mind, New Way!’를 경영 슬로건으로 정하고 변화를 다짐하며 2002년을 시작했다. 한편, 기업가치를 외부에 알리기 위한 노력도 지속됐다. 1999년 회사를 상장한 이후 처음으로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를 초청, 실적과 회사의 경영방침을 설명하는 공개 IR설명회를 개최하고,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열린 ‘한국의 날’ 행사에 참가하는 등 본격적인 국내외 IR활동에 착수한 것이다. | |||
모그룹인 LG가 2003년 통합지주회사 출범과 함께 화학 및 전자·통신 등 주력 핵심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LG애드의 지분 28.5%를 세계 최대의 광고그룹인 WPP에 넘겨주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경영환경에서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다. WPP는 LG애드의 발행주식 중 최대 주주로부터 28.5%의 지분을 포함한 총 35.8%를 취득하고, 12월 4일 이 내용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LG애드는 기존에 LG애드가 보유하고 있는 국내 영업기반 및 크리에이티브력과 WPP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결합하여 최대한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 브랜드 인지도를 강화하면서 수익구조를 다양화하여 보다 경쟁력 있는 회사로 거듭 태어나게 된 것이다. WPP그룹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의 전부문을 통합해 다국적 서비스를 하는 세계 최대의 글로벌 광고·홍보그룹으로,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두고 산하에 JWT·오길비 앤 매더(Ogilvy & Mather)·영 앤 루비컴(Young & Rubicam) 등 세계 굴지의 광고회사들을 두고 있다. LG애드는 2003년 이렇게 WPP의 일원으로 새 출발하면서 회사의 경영 슬로건을 ‘Re-Birth LG Ad’로 정하고, 경영과 제도 등의 외적인 변화뿐 아니라 의식·생각·각오도 변화, 업그레이드할 것을 결의했다.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침으로 ‘파트너십(Partnership)’·‘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노베이션(Innovation)’을 천명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조직과 기업의 문화의 혁신을 이루어내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에 WPP의 CEO인 Sir Martin Sorrell이 직접 한국을 방문하고, LG애드가 WPP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Sir Matrin Sorrell은 향후 아시아 지역이 세계 광고시장 성장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특히 한국에서는 LG애드가 그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와 포부를 밝혔다. Sir Martin Sorrell은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주요 광고단체장들과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 기자들과의 프레스 컨퍼런스(Press Conference)를 통해 한국 광고시장의 발전에 대한 WPP의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또 LG애드의 광고주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갖고, LG애드가 WPP의 선진 노하우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함께하는 일원임을 천명했다. 이어서 6월에는 회사의 기업경영 철학 및 향후 발전방향과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공유하며 새 출발을 다짐하는 ‘Re-Birth LG Ad’ 행사를 창사 이래 최대 규모로 1박 2일간 제주도에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에서 LG애드는 앞으로의 경영철학을 ‘고객과 브랜드의 관계를 찾아내 이어주는 심마니가 되는 것’이라고 정하고, 고객과 브랜드 사이의 이러한 ‘연(緣)’을 찾아내고 승화시키는 것이 회사의 역할이자 사명(使命)이라는 내용의 비전 선언문(Vision Statement)을 발표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고객과 브랜드 사이에 숨어있는 연을 찾아내는 심마니입니다. 우리는 고객과 브랜드의 관계를 연으로 승화시키는 연금술사입니다.’ |
한편, 7월 1일자로 이인호(李仁浩) 대표이사 사장을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 발령하는 한편, 광고 부문(Advertising Communication Division)과 프로모션 부문(Specialist Communication Division)의 양대 영업 부문 운영을 통한 책임 경영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또 같은 날 창립 19주년을 맞이해 기념식을 갖고 새로 제정된 CI를 발표했다. | ||
국내 최초 광고그룹으로서의 새로운 도전 이에 따라 광고 제작물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고 산하 스태프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기존 광고제작 부문 산하 4개 CD그룹을 분리하여 팀 단위 조직으로 변경하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아울러 크리에이티브력 강화를 위해 CCO(Chief Creative Officer)를 신설하고 이재철 부사장을 영입했다. 또 기존 뉴욕지사를 법인으로 승격시킨 것과 아울러 해외시장 진출 및 공략을 가속화하고 있는 광고주들의 해외 마케팅 지원 능력을 높이기 위해 추가 법인 설립 및 지사 개설 계획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WTL은 LG애드 뉴욕지사와 미국 내 WPP의 광고인력 및 네트워크가 결합한 형태로서, 이를 통해 미주지역에 진출한 광고주의 광고 마케팅 업무를 지원하고 해당 지역의 영업을 대폭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6월에는 이사회를 개최하고 국내 최초의 광고그룹으로 도약한다는 구상 하에 기업구조조정 변경안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9월 1일부로 회사를 순수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분리하게 되며, 광고영업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사업회사에 LG애드 사명을 이전할 계획이다. 이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회사의 미래상과 관련해, 기존 하우스 에이전시 체제와 한 업종, 한 광고주만을 보유할 수 있는 현 광고회사 구조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 이를 돌파하기 위한 결단이다. 이에 따라 외국의 광고그룹처럼 광고기획 및 제작은 각 사업회사를 통해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광고주를 그룹 내에 유치해 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을 전망이다. 이러한 LG애드의 광고그룹화는 기존 국내에 진출해 있는 WPP 계열사들과는 별개로 회사의 중장기 성장 계획 수립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2004년 창립 20주년을 맞아 LG애드는 광고그룹으로의 새로운 도약을 예고하고 나섰다. 지난 20년 간 수많은 성공 캠페인을 창출해내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광고회사로 자리 잡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 글로벌 광고회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힘찬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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