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나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대뜸 글의 요지와는 전혀 관계없는 최신 상위노출 키워드를 거론해 보자면,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화제다. ("키워드 검색의 요정들아, 날 좀 도와줘!") 그분의 시집을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가 한 끼 저녁처럼 꺼내 먹는 탐독자로서 크게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지만 스크롤을 드륵드륵 긁다가 순간 뇌리에 남는 기사는 90년 뒤 공개될 작품 캡슐이었다. 긴 겨울잠을 청하는 아기곰처럼 그 소설은 노르웨이 어느 숲에 잠들었다가 90년 뒤 세상의 빛을 볼 것이다. 그런데 나의 글들은 주인을 잘못 만나 하루는커녕 반나절을 못 넘겨 들춰지고 뜯겨지고 깎이기 일쑤다. 태어나게 해준 자의 못마땅한 눈초리를 끝없이 견디고 못 받을 미움까지 다 받고 결국 허공에 내다 버려질 것들. 나는 90년이나 묵혀둘 정도로 나의 글을 사랑하지 못한다. 되려 매일 미워하기 바쁘다.
애사심으로 시작한 회사 블로그 기고글들도 마찬가지다. 보이는 한 글자 한 글자가 후회며, 썼다 지워서 지금은 LCD 화면에 보이지 않는 그 한 글자까지 내겐 모조리 후회다. 지난 실패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또 굳이 들춰서 후회하는 사람. 그게 나다. 이런 성향을 최근엔 이렇게 규정하기로 했다. 과거지향적 완벽주의자. 이런 나에게도 구원이 있을까. 이런 당신에게도 구원이 올까. 닳고 닳아 새까맣게 탄 염주처럼, 지금도 이 손안엔 실패와 후회의 덩어리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나는 이것을 주섬주섬 꺼내 당신 눈앞에 간증처럼 꺼내 놓을까 한다.
사랑의 실패
"오빠는 꿈이 뭐야?"
흔들리는 4호선 열차.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빠는 꿈이 뭐냐고." 그녀의 거듭된 질문엔 '도대체'라는 말이 어딘가에라도 생략되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사실 그땐 몰랐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다. 아무튼 그땐 'DDP역'이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보다는 '동대문운동장역'이라는 역명이 더 입에 붙던 시절이었고 남자는 26살, 인생의 기로에 서 있는 시기기도 했다. 남자는 레일과 열차가 맞부딪히는 소리 틈에서 조곤조곤 말했다.
"나? 덩크슛. 30살 되기 전에 덩크슛 하는 게 내 꿈이야." (말똥말똥)
여자는 4호선 열차와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 환승이 어디더라.
그녀는 남자가 2년 뒤 카피라이터가 되었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라도 들었을까. 와이프와 오손도손 '따순 밥'을 먹으며 두둑한 월급통장을 뒷배로 팔자 좋게 알리익스프레스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지금, 그때를 더듬어보는 일은 내 마음에 어떠한 동요도 주지 못하지만, 나와 미래를 함께 하고자 했던 사람에게 비전을 보이지 못한 점과 강백호에 훨씬 못 미치는 서전트 점프력으로 감히 덩크슛을 입에 올렸다는 사실은 여지없이 내 후회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그 철딱서니 없던 26살의 망언을 지금 회사 블로그 기고글처럼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여전히 고통받는다. 더욱이 HSAD의 일개 사원으로서 몰래 품고 있는 이 앙큼하고 원대한 야망(?)을 와이프에게 말할 때는 더더욱 26살의 내가 하찮고 초라해지는 것이다.
취직의 실패
경력사항: 연신내 성인 도박 PC방 아르바이트 (3개월)
이것은 실제 한 카피라이터 지망생의 이력서다. 심지어 75번의 낙방 끝에 76번째 제출한 자소서가 이 꼬라지였다. 가수가 되기 위해 100번 오디션 봤다는 정지훈 님의 말씀에 크게 감화되어 그럼 나는 200번 찔러보면 되겠다 했던, 그 철딱서니 없는 27살 카피라이터 지망생의 경력사항. 그런데 웬걸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대한민국 제16대 광고명장(이건 방금 내가 지어낸 말이다.)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저는 이 한 줄 하나 때문에 당신 부른 거예요."
샛노랗게 탈색한 내 머리카락을 보며 예상한 놈이 왔다는 표정을 지으신 명장님은 곧바로 준비된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술은 좀 할 줄 알아요?" 유비에게 충성을 맹세하러 달려온 조자룡처럼 "마실 줄 압니다!" 호방한 기세로 외쳤다. 그날이 내 첫 출근 날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고조부 시절부터 계승된 '알쓰' 유전자 보유 집안이었으니. 내 나약한 몸뚱이는 첫 회식 2잔째만에 차가운 철제 테이블 위로 처박혔다. 놀 줄 아는 연신내 동네 후배가 막내로 들어왔다고 들떠 계셨던 제16대 조리명장, 아니 광고명장님께 나의 그 모습은 거짓말쟁이의 참혹한 민낯이었을 것이다.
1년 반 뒤 HSAD로 이직을 하고 여태 지금까지도, 대책 없이 당찼던 그 대답을 돌이키며 후회의 덩어리를 만지작거린다. 못 마신다고 솔직히 답했으면 어땠을까. 기절하는 편이지만 기절된 상태로 최선을 다해보겠다 했으면 어땠을까. 더 더 더 나은 대답은 없었을까. Truth well told. 어느 광고회사의 슬로건처럼. '더 잘 말해진 진실'로 그 질문에 답할 수는 없었을까?
취미의 실패
"정말 나… 이거, 사도 되는 걸까?" (벌벌벌)
아까 월급통장 두둑하다 어쩌다 했는데 사실 거짓말이다. 어느 날 로드 자전거를 사고 싶던 밤중에 90만 원짜리 거액의 결제창 앞에서 오한처럼 몸을 벌벌 떨던 37세 가장은, 옆자리 와이프의 잠결 동의를 구하고 초록버튼을 꾸욱 눌러버린 것이다. 저질러버렸다. 장롱면허 무사고 10년 차 드라이버로서 도로 위 야성미를 다시 한번 발휘해 볼 요량으로 콧구멍을 적토마처럼 벌렁거렸지만 '초등학생 우리 아들이 좋아해요!' '중학생 입문용으로 사주었습니다…' 같은 리뷰는 애써 무시하기로 한다.
몇 번의 굴욕 라이딩 끝에 '초등학생 우리 아들'보다는 조금 더 나은 라이더가 되고 싶던 37세 가장은, 조금씩 부품 업그레이드를 하기로 하는데(현질로 이긴다) 그러다 그 사달이 나버린 것이다. 공구 중에 '토크렌치'라고 적정세기(토크)를 설정해서 볼트를 조여주는 도구가 있는데, 나는 <기술·가정> 교과목에서 <가정> 선생님을 더 좋아했던 남녀공학 샤방 문돌이로서 이 토크렌치라는 것을 처음 써봤고 적정세기를 부적정하게 설정한 끝에 자전거의 주요 부품을 날려먹었다.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실수가 아니었고 각고의 노력 끝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아무리 젠더리스 남녀 역할의 경계가 없는 시대라지만 공구 하나 제대로 못 다뤄서 폐급 병사처럼 찌부러져 우는 이 모습은 우리 와이프는 절대 공감 못할 남자 일생 최악의 경험이었으며, 지금도 가끔 밥솥에 물 얹을 때 물량 조절에 실패한 날엔 문득 그날 생각이 울컥 나버린 것이다.
(쥬류륵… 또르르륵… 앗… 어째서 밥솥에 눈물이…)
실패를 플레이하다
블로그 글부터 사랑, 취업, 취미까지 실패와 후회로 이어진 삶을 살았다. 실패로부터 배운 것들이 많잖아, 라고 말한다면 고갤 끄덕이겠지만. 그것들로 인해 나는 오늘도 스스로를 상처 내고 상대방을 상처 준다. 그러고는 놔두지 않고 끊임없이 들추고 들쑤시면서 아물 틈을 주지 않는다. 이렇듯 과거지향적 완벽주의자의 하루는 실패와 그 실패를 반추하는 일과로 멍울져있다. 그러면 도무지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때가 오는데.
처음 exe 실행파일을 클릭했던 게임은 <삼국지4>였다. 아마 2만 시간 정도는 했을까? 방학 때는 아주 골방에 틀어박혀 그것만 돌렸으니까. 그렇게 쭉 <삼국지> 시리즈를 11까지 즐겼으니 당연히 총합 플레이 타임은 몇 배가 될 것이다. 하루 꼬박 플레이하면 게임 속 시간으로 50년 정도 진행되니까 지금까지 삼국지 속 세계 속에서 얼추 10만 년 정도 살았다고 보면 되겠다.
성을 함락 당하고. 믿었던 형제에게 배신당하고. 실수로 충신의 목을 베고. 경솔한 언행으로 황제를 능멸하고. 고지를 점하라 하였거늘 고지 아래에서 전멸 당하고. 덧없는 권력의 끝에서 지는 별을 넋 놓아 보고. 현생 37년을 살면서도 수많은 실패를 하며 살았는데 게임 속 10만 년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실패를 하며 살았을까. 그 셀 수 없는 실패로부터 배운 것들이 많다면 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배웠을까.
모든 게임은 실패를 플레이하는 게임이다. 그러나 그곳엔 상처받는 이가 없다. 내게 게임은 고매한 예술도 기특한 산업도 타락의 온상지도 아니다. 그저 '실패'가 있으되 '상처'가 없기에, 잠시 머물 뿐이다. '경험'이 있으되 '후회'가 없기에 그 잠시에서 나아갈 힘을 얻을 뿐이다.
옛말에 삼국지를 3번 읽은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말라 하였다. 아뿔싸. 그래서 나랑 아무도 대화를 안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삼국지>를 3만 번 플레이 사람은 또 한 번 상처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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