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인생을 결정지을 중차대한 질문에 대비하기
그런 상상을 해 본다. 늦지 않은 시간 새똥을 피해 가며 걷고 있는데, 웬 낯선 이들의 손짓이 나를 부른다. 촬영에 동의하냐는 질문은 시원하게 패싱 된 채, 이미 카메라엔 빨간 불이 켜져 있다. 이때쯤 번뜩 눈치를 챈다. '삐-싱!' 유튜브 숏츠, 인스타 등에서 보던 일반인 인터뷰구나! 두뇌는 풀가동을 시작하고, 가부좌를 튼 빨간 망토 마법사 아저씨처럼 모든 경우의 수를 무한정 산출해 보는데. 내 외모를 10점 만점 중 몇 점으로 말할 건지, 100억 받고 랜덤을 돌릴 건지, 아찔하게 외줄 타듯 그러나 댓글창이 불타지 않을 정도의 딱 센스 있고 어뗀띡한 대답을 모색한다. 그러나 이 몸의 지능은 마법사 털보 아저씨보단 이성 잃은 녹색괴물 아저씨에 더 가까웠고, 그들은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을 내놓는다.
"지금 음악 뭐 듣고 계세요?"
'삐-싱!' (2회 차 삐싱입니다) <뉴진스의 하입보이요> 밈을 탄생시킨 그 인터뷰구나! 그거라면 족히 2년 전부터 시뮬레이션을 종종 돌려오던 터였다. "음. Frank Ocean의 Self-Control이요.(이걸 아시려나? 하는 조금 건방지지만, 그러나 은근한 배려가 새어 나오는 훈훈 미소 찡-긋)"을 갈겨주며 <음악 좀 아는 놈> 타이틀을 획득해 가거나, 실리카겔의 1집 마지막 트랙을 언급하며 '나만의 작은 실리카겔' 시절을 조금은 그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밴드 붐은 온다'의 명예로운 일원으로 21세기 한국 대중음악사에 길이길이 기억되는 방법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김강토처럼 디깅하지도 우키팝처럼 리얼하지도 못한 애송이 아니던가. 있어 보이려 하면 진짜들에게 다 들키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금 특이한 대안으로 이런 건 어떤가? 게임 BGM을 말해보는 것이다. 죽어도 평범해 보이고 싶지 않다면! <연신내 닌텐도 스위치남> 뭐 이런 식의 이색적인 타이틀에라도 욕심이 난다면! 이것은 아주 훌륭한 대안이 될 것이다. 남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인생의 아주 매콤한 맛을 맛보게 될 테지만 말이다. (매콤보다는 어둠에 가깝겠지만.)
내연기관을 내 아내처럼 사랑하는 로맨티시스트가 되고 싶다면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에 가히 버금가는 나의 천재적 제안에 기꺼이 동의했다면(?) 어떤 게임 BGM을 말할지가 이제부터 관건이다. 게임 BGM계의 '에센셜'이자 게임 OST계의 '떼껄룩'인 나 님의 세부 컨설팅이 이미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비 냄새 모락모락 피어나는 젖은 아스팔트 위를 파파팟 가르며 뻑뻑한 수동 기어를 면도하고 남은 코털처럼 맹렬히 쥐어뜯는 거친 로맨티시스트의 이미지를 선점하고 싶다면, 당신에겐 <포르자 호라이즌 4>의 인트로 BGM 『ODESZA - A Moment Apart』가 적격이다.
포르자 호라이즌 시리즈는 만인의 드림카를 벗 삼아 오픈월드를 유랑하는 꽤나 근사한 게임이며, 유로 트럭 시리즈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레이싱 게임이다. 닌텐도 스위치 혹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이 아닌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 진영의 게임이라서 조금 마이너 한 구석이 있지만, 그래서 더 힙한 것이다. 마치 나만 아는 프랑스 6인조 디스코 그룹의 노래를 대는 것만큼이나 멋져 보인다. 엑스박스 진영이 무릇 그렇듯 PC로도 플레이가 가능하니, 지금 당장이라도 회사 노트북에 설치해서 즐겨보자. 법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다.
고슬고슬한 사연을 간직한 라라랜드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뭐 듣고 있냐'는 질문에 '레이싱 게임 BGM을 듣고 있다'는 대답이 조금 과하다면, 다소 웅취가 느껴진다면, 또 다른 훌륭한 대안이 마련되어 있다. 2017년 우리 집 거실을 뜨겁게 달군 바로 그 게임, <마리오 오디세이> OST 되시겠다. 갑자기 고백하자면 한평생 나를 울린 재즈곡이 딱 2곡 있는데(… 너무 갑자기 아닌가), 영화 <라라랜드>의 엔딩곡과 그리고 지금 소개해 줄 『Jump Up, Super Star!』되시겠다.
담당 성우가 먼저 은퇴할 정도로 오랜 시간 현역으로 뛰고 있는 슈퍼 마리오가 이 게임에서도 쿠파에 맞서 피치 공주를 구하고 있는데, 웬걸 뉴욕으로 추정되는 어느 도시 재즈바에서 35년 전 첫사랑과 조우하게 된다. 폴린이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쿠파에게 붙잡힌 공주를 구하는 마리오'라는 철밥통 세계관이 정립되기 전 연이 닿았던 인물로서, 재즈바 관중 속 옛 연인(마리오)을 앞에 두고 마이크 스탠드 앞에서 신명 나는 재즈곡 한 곡조를 뽑기 시작한다. 마치 <라라랜드>의 엠마 스톤이 라이언 고슬링과의 짧지 않은 인연을 건반 위 곡진한 멜로디 하나로 돌이켜보는 것처럼, 마리오와 폴린 사이에도 우리가 모를 둘만의 사연이 재즈 스윙을 타고 마구 흐르는데, 나의 눈물샘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지구밖으로 오디세이를 떠나는 기분이었다.
… 음. 그러니까 당신! 누가 뭐 듣냐고 묻거든, 들뜬 마음을 스톤처럼 억누르고 고슬고슬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라. 그리고 당당히 마리오 오디세이의 『Jump Up, Super Star!』를 듣고 있다고 답하라! 아주 엠마스럽고 아주 라이언스러운 별 다섯 개짜리 대답이 될 것이다.
어둠의 다크니스로 좌중을 압도하는 미친 카리스마를 원한다면
평범함을 거부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당신이지만, 어쩐지 위 두 곡에서도 '인싸 PICK'의 냄새를 지울 수 없다면, 마이너 한 창작물을 리뷰하는 모 유튜버의 심정으로 더욱더 딥한 곡을 제안해 줄 수도 있겠다. 인디 게임 개발사의 인디 게임 BGM은 어떤가? 바로 <Slay the Spire>의 『The city』라는 곡이다. 어둠의 탑에서 암약하는 악의 무리를 칼자루 하나로 때려잡는 이 게임은 놀랍게도 유려한 커맨드 입력 대신 화투나 포커 같은 카드게임 형식으로 진행이 된다. 마치 <반지의 제왕>의 세계관을 <타짜>의 손맛으로 즐기는 듯한 이 '하이브리드 한 게임성'에 전 세계 인디게임 팬들이 전부 깡그리 매료되고 말았는데, 그에 못지않게 이 게임의 성공을 견인했다고 보는 것이 다름 아닌 BGM이다.
루마니아의 어느 밤길거리를 홀로 휘젓고 다니는 마성의 쿨톤 미남자가 연상되는 이 BGM은, 이름을 대는 순간 모두가 소스라치고 자지러질 정도로 당신을 매력적으로 만들 것이다. 내 1달 용돈을 훨씬 웃도는 고가의 클래식 공연에서나 볼 법한 이 장중하고 위엄찬 노래를, 지하철 짐짝 칸 한구석에서 대략 5,000원의 푼돈을 지불한 게임의 덤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문명의 혜택이자 풍요의 산물이다. 어떤가. 과중한 업무와 더불어 갑과 을의 역할놀이에 치여 상실되었던 당신의 카리스마가 검은 심연으로부터 고속 충전되는 게 느껴지는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앱스토어 충전 금액이 부족한 건 아닌지 확인해 보자.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안티-엔트로피 레지스탕스가 되고 싶다면
최신곡만을 좇는 칠푼이 팔푼이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면, 이 대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4년 최첨단 모바일 디바이스로 1998년 손범수의 가요톱 10 명곡 리스트를 뽑아 듣는 당신의 그 안목에 감복하면서, 세기말 게임 CD로 당신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 보이겠다. 삼촌과 외삼촌이 나란히 앉아 사이좋게 키보드를 박살 내던 바로 그 게임, <FIFA 2000>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포츠 게임은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게임성의 혁신적인 발전이 있다기보다는, 그래픽카드의 발전에 발맞춰서 박지성 선수의 얼굴이 1픽셀 정도 현실에 가까워지는 정도였는데, 우리가 몸으로 확실히 느낄 수 있던 차이는 다름 아닌 OST였다. 해마다 넘버링을 바꿔서 출시하는 스포츠 게임 특성상 해마다 당대 명곡들을 BGM으로 깔아 놓게 되는데, OST 전담 개발팀(?)이 개발사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찬탄을 금치 못할 넘버들이 각각 시리즈에 솔찬히 깔려 있다.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내가 축구 게임에 손을 대기 시작한 <FIFA 98>부터 최근 <FC 24>까지, 어느 OST 한 소절만 들려주면 난 즉시 그 자리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꿈과 열정, 에너지까지 빌려 받는 느낌이 든다.
나의 파멸적인 무호흡 솔루션 때문에 본래 질문을 잊어버렸을까 재차 이야기하지만, 누군가 뭘 듣고 있냐고 물어볼 때, 『Robbie williams - It's Only Us』 같은 스포츠 게임 OST를 이야기한다면, 당신의 인터뷰는 오늘을 살기 위해 그 시절의 에너지를 빌려 쓰는 2,000만 전우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을 것이다.
숨 막히는 법정공방을 가히 소꿉장난으로 만들어버리는 뇌섹남이 되고 싶다면
살면서 온갖 게임을 해왔고 별의별 꼴을 다 봤다고 생각했다만.(좋은 쪽으로) 법정에서 앵무새가 증인으로 참석하고 그 앵무새를 진지하게 신문하는 이 게임 앞에서, 이 몸은 갓난아기의 눈빛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역전재판>이란 게임은 잘 모르더라도, "이의 있소!" 짤은 본 적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 짤만 보고 실제 법정이 그러하리라는 상상은 어림도 없듯이 꽤나 발칙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임이다. 법학적 지식이 전무할수록 유리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입문 허들이 낮고, 논리와 언변으로 풀어나간다는 인상과는 다르게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플레이어의 혼을 아득히 나가게 해 준다. 때문에 팬덤이 상당히 두-툼한 시리즈기도 하다.
명작 게임들이 공히 그러하듯이 BGM이 하나하나 모두 훌륭한데, 이번엔 좀 특이하게 팬메이드 리믹스 BGM를 제안드린다. 오로지 게임 BGM과 사운드 이펙트만을 활용하여 버무린 이 리믹스는 Funk라는 장르에 디스코 또는 레트로(퓨처라고 읽는다)를 가미한 비슷한 장르 음악들 못지않은 완성도로 팬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
게임 BGM 듣고 있다는 대답만으로는 뭔가 아쉽고 밋밋하다면, 2차 창작을 흠뻑 즐기고 있는 '찐팬'의 입장을 견지하며, 팬 메이드 리믹스를 즐기고 있다고 가볍게 대답해 주는 건 어떨까. 이 정도라면 당신이 '진짜'임을 부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슬쩍 해당인물 '미츠루기 레이지'의 미소를 내보인다면, 더더욱.
음악도 예술이고 그림도 예술이고 행위도 예술이라면
머리에 꽃밭만 가득했던 지난 글들과는 다르게 오늘은 좀 더 실용적이고 건설적으로 '유튜브 길거리 인터뷰에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페르소나 5>의『 Last Surprise 』라든지, <Grand Theft Auto: San Andreas>의 G-FUNK 곡들이라든지, 아직 소개하지 못한 곡들이 많아 아쉽다만. 이렇게 나 혼자 신나 버린 채로 광기를 계속 쏟아내다간, '게임은 질병'이라는 세간의 오해에 미력한 보탬이 될 것 같아, 자중하고 글을 마칠까 한다.
사실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음악은 예술이다. 당연히 그림도 예술이고, 행위도 예술이다. 그렇다면 그 예술들을 선별하고, 조합하고, 정제하고, 최적의 형태로 디자인하여, 플레이어의 행위로써 경험하게 하는 게임이란 것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글쎄. 그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는 이미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저명하신 분들 사이에서 충분히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나처럼 조금이라도 있어 보이고 싶어 하고, 그러나 진짜 아는 건 질소포장만큼이나 별것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과 그림처럼 삶 곳곳에 자리한 예술적 요소에서 영감과 에너지를 얻으며 살아가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게임이란 어떤 의미일까.
어느 스트리머의 라이브 방송에서 게스트로 나온 이동진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책은 물이고, 영화는 술이에요."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들이 더 '쓰껄'하지만, 아무튼 '책은 물'이고 '영화는 술'이라 한다면, 대체 게임이란 것은 무엇일까. 술과 물을 모두 담아서 누구나 먹기 좋게 품어주는 냉장고일까. 아님 그들 옆의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탄산음료일까. 음. 으음. 으으음. 원고 기한이 무려 3시간밖에 남지 않아 빨리 네이버 맞춤법 검사 한 번 돌리고 파일 전송 꾸욱 눌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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