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용인시 수박 대참사
"슬슬 과일 좀 깎아줄까?"
평화로운 명절 한 가족의 모습. 모두가 행복해야 할 그곳에서 그날의 참사는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 수박 좀 봐라! 자알 익은 거!"
"…."
딸 한 입. 아버지 한 입. 할머니 한 입. 냠냠냠. 이토록 화기애애한 명절의 한 구석에서, 저기 홀로 비트코인에 물린 비트겐슈타인마냥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 집안의 사위 신 서방 되시겠다.
"응? 왜 신 서방은 들질 않고?"
"…."
"Hey! What are you doing, bro?!"
이젠 미국에서 온 백인 동서마저도 막 다그치기 시작하는데. 장.. 장인어른! 제.. 제가 사실 과일을 못 먹습니다! 이 한마디 말하기가 어쩜 그리 부끄러운지. 순간 고개를 푸우욱 숙여버렸고 그렇게 시간은 7년 뒤 2024년으로 워프 되었다.
2024년 수박의 봄
여느 날처럼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수박게임>에 열중하던 나는, 불현듯 7년 전 그날의 참사를 떠올리며, 이 순간 지구 위에서 자라나고 있는 과일과의 기나긴 악연에 대해 돌이켜 보았다.
애당초 어머니의 수 차례 가정폭력(*등짝공격)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편식만을 고집해 온 외길인생. 이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기회도 없었으나 지금 <수박게임>을 하면서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내 모습에, 석연찮은 메타인지적 부조화가 일어나 버린 것이다.
딸기는 못 먹지만 딸기우유는 투쁠원(2+1)으로 한 바가지 챙겨 먹는 나.
사과는 못 먹지만 사과잼은 큰 숟갈로 퍼서 식빵 옆구리 터질 때까지 발라먹는 나.
체리는 못 먹지만 체리향 립밤은 짭짭거리며 향긋해하는 나.
아, 이토록 이중적인 나란 사람.
내면의 성찰이 혁신의 불꽃처럼 파파팍 일어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 앞의 GAME OVER를 뒤로 하고, 홀로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며 나는 <인생과 편식 그리고 게임>이란 주제로, 더 깊은 생각을 이어나가 보기로 한다.
과일, 너만을 싫어하는 10가지 이유
☆★☜내가 너만을 사랑하는 10가지 이유☞★☆라는 식의 감성짤을 마구 올려대던 싸이월드 시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나는 과일을 싫어했었고 10가지 이유를 대보라 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10개를 댈 자신은 없지만 어버버버 하면서 3개 정도는 충분히 댈 자신이 있었다. 그 이유로 제시하는 3가지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1. 식감.
2. 신맛.
3. 번잡시러움.
어쩌다 인간 신동혁은 과일도 못 먹는 편식쟁이가 되었는지. 이에 곁들여 어쩌다 겜돌이가 되었는지. 이 글은 그에 대한 아주 두서없는 항변 혹은 아름다운 궤변이 될 것이다. (안될 수도 있다)
편식하는 이유 1. 식감
한 입 베어 물면 앙, 콰지지직. 과즙이 쮸읍. 허허, 상상만 해도 참 부담스럽다. 과즙과 과육이 무례하게 입 안을 헤집어 놓으면, 혼란스러운 민수처럼 내 미각에 과부하가 걸리는데 그러면 과일을 맛보는 즐거움보다 식감을 감당해야 하는 혀의 부담이 더 커진다. 하찮게도, 과일의 식감이란 내게 참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때론 인간관계나 사회생활도 그런 식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달짝지근하고 배도 부르게 해 주지만,마음을 잔뜩 어지럽히곤 한다. 즐거움보다 감당해야 하는 마음의 부담이 더 클 때도 있다. 수박바를 자꾸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가끔 게임을 하기도 한다. 인간관계의 단맛만, 사회생활의 포만감만 부담 없이 꺼내 먹을 수 있기에. 수박바가 문득 먹고 싶어지는 시간에 말이다.
편식하는 이유 2. 신맛
식감이 비교적 덜 부담스러운, 커피로 치면 목 넘김이 좋은 과일들도 아주 더러 있다. 예컨데 사과나 망고처럼 정갈한 과육을 지닌 녀석들. 그러나 내 미각은 검문소 앞에서 그들을 막아서고 마는데, 그들이 몰래 바지춤에 숨기고 온 신맛 때문이다. 차라리 감식초처럼 대놓고 신맛을 뽐내면 차라리 그래라 하고 말 텐데, 단맛과 신맛의 오묘한 중간 맛이 나의 판단 체계를 마구 뒤흔든다. 표정을 으~ 하게 만든다.
가끔 인생에서도 오묘한 신맛이 느껴질 때가 있고, 우린 그때 영화를 찾고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한다. 그들에겐 정해진 장르, 분명한 체계, 반복 된 리듬이 있으니까. 매운맛과 순한 맛의 명확한 지점이 있으니까. 가끔 인생의 오묘한 것들이, 그들의 명확함에 빗대어져 번뜩 이해될 때도 있다.
예컨대, 업무역량이 정체되어 있을 때 '레벨업'이라는 계단식 성장 시스템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는 건, 게이머들 사이에서 흔한 위로법 아닌가. (아니다.)
편식하는 이유 3. 번잡스러움
식감도 좋고 신맛도 없는 전설의 과일이 내 앞에 놓여 있다 해도, 나는 마치 철 지난 장난감을 대하는 고양이처럼 고개를 휙 돌릴 것이다. 번잡스럽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꿀밤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을 텐데 나도 같은 생각이다.)
나처럼 특이한 놈이 아니더라도, 극단적 편식주의가 아니더라도, 과일가게 옆 주스가게에서 생과일주스를 사 먹어 본 기억이 있다면. 제철 딸기를 지나 딸기우유를 집어든 기억이 있다면. 편의성을 문뜩문뜩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게임이란 것을 사랑할 준비도 되어있는 사람이다.
게임은 간편함과 편의성이 가장 강력한 무기다. 모든 혁신이나 신기술이 그러하듯 말이다. 손흥민처럼 되는 일은 간편한 일이 아니지만, 손흥민이 되어보는 기분은 간편하게 맛볼 수 있다. 카이사르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로마를 통치하는 기분은 간단하게 맛볼 수 있다.
게임은 현실보다 간편하고, 간편한 것엔 힘이 있다. 간편하게 맛보고 남은 힘을, 현생에 더 쏟아부을 수 있으니까. 하다 못해 자기 전 게임 한 판이 내일 출근할 힘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수박. 게임은 수박바.
"슬슬 과일 좀 깎아줄까?"
또다시 명절. 평화로운 가족의 한 모습. 식감 어쩌구 신맛 어쩌구 쭝얼쭝얼 잠꼬대를 하는 사위를 깨우며 장모님이 상을 올리신다.
"이 수박 좀 봐라! 자알 익은 거!"
"…!!"
수박 대신 수박바를 까 주시는 장모님. 무려 딸기마루도 있고 심지어 메로나도 있다. 딸 한 입. 아버지 한 입. 할머니 한 입. 사위도 한 입. 냠냠냠. 그날, 눈물 젖은 수박바는 참 맛있었다고 한다.
신동혁의 일상 이야기 20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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