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9년 전인 1953년 6월 2일, 런던 버킹엄 궁에서 출발한 황금 마차가 잉글랜드 성공회(국교회)의 본산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으로 향합니다. 이 유서 깊은 성당은 역대 잉글랜드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된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날 또 한 명의 잉글랜드 왕이 성공회 대주교로부터 왕관을 넘겨받아 머리에 쓰게 될 예정입니다. 황금 마차에 탄 주인공은 지난 52년 타계한 조지 6세의 장녀이자 엘리자베스란 이름을 쓰게 된 두 번째 여왕, 엘리자베스 2세입니다. 이후 무려 70년 가까이 이어진 전무후무한 그녀의 긴긴 통치의 시작을 알린 성대한 예식이 열린 것입니다.
이날 즉위식은 역대 대관식 중 처음으로 BBC를 통해 전 세계에게 실황 중계되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영국 여왕의 즉위식 전 과정을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 년 역사의 고색창연한 이 대성당(영국 종교개혁 이전에는 가톨릭 수도원이었습니다만 엘리자베스 1세 통치 시기에 국가가 몰수하여 오늘날 잉글랜드 성공회 성당이 되었습니다)엔 왕실 왕족들과 귀족, 정부 인사가 총집결해 새로운 여왕의 탄생을 지켜보았습니다. 격식의 나라 영국이 새로운 왕을 맞아 혼신의 힘을 기울여 준비한 의례(儀禮)인 만큼 대관식은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이 장엄한 의식에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음악’입니다.
음악이 없는 예식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더더욱 이날 대관식에는 영국 왕을 찬양하는 혹은 영국 왕이 사랑했던 음악들로 가득했습니다. 한마디로 대관식은 왕실 음악의 향연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주요만 장면들 마다 연주되었던 곡들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은 명곡입니다. 몇 가지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은 영국 왕실 역사상 최초로 BBC에서 중계한 덕분에 그 모든 과정을 오늘날 생생히 살펴볼 수 있다. 대관식은 왕위 승계 직후가 아닌 무려 16개월이나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여왕이 입장하기 전 공작(Duke) 칭호를 가진 주요 왕족들 그리고 뒤이어 성공회 주교단을 비롯한 고위 사제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제대(祭臺) 주변으로 먼저 입장하며 도열합니다. 바로 이때, 「왕궁의 불꽃놀이(Music for the Royal Fireworks)」의 서곡(overture)이 연주됩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음악은 18세기 영국 왕실에서 주최한 불꽃놀이의 배경음악으로 활용하기 위해 작곡된 일종의 행사 음악이었습니다. 웅장하면서도 활기찬 리듬으로 흥을 돋우는, 대표적인 바로크 관현악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곡은 조지 2세(1727-1760년 재위)가 당대 유럽 최고의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던 헨델에게 의뢰하여 작곡한 것입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까지, 바흐와 동시대를 살았던 헨델은 종교음악과 순수 음악에 치중했던 바흐와 달리 연회 음악이나 오라토리오 같은 세속적인 음악 작업에도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특히, 영국 왕실을 위한 음악을 여럿 작곡하였습니다. 앤 여왕과 조지 1세 그리고 그의 아들 조지 2세가 대표적인 그의 후원자이자 클라이언트입니다. 그는 독일 태생이지만 작곡가로서의 전성기를 영국에서 보냈고, 그 참에 아예 영국으로 귀화하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서 생을 마무리할 정도였으니, 핏줄은 독일인이되 사실상 영국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고향 독일식으로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andel)이라고 부르지만, 영국 사람들은 영어식 이름인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로 부릅니다.
2012년 BBC 프롬스 축제에서 연주된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이 연주는 18세기 바로크 시대의 고악기들을 사용해 당시의 연주 재현했습니다. 지금의 악기와 달리 사뭇 투박하게 들립니다.
그리고 이 ‘영국 사람’ 헨델의 손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역작이 대관식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합니다. 바로 성공회 최고 사제인 캔터베리 대주교가 여왕에게 왕홀과 반지와 같은 군주의 상징물을 전달하고, 왕관을 머리에 얹히는 가장 중요한 의식을 진행하기에 앞서 그 유명한 「사제 차독(Zadok the Priest)」이 연주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제 차독은 헨델이 자신의 음악을 사랑했던 후원자 조지 1세가 타계한 후 왕위를 이어받은 그의 아들 조지 2세의 대관식을 기념해 작곡한 「대관식 찬가(Coronation Anthem)」 중 첫 번째 곡입니다. 우리에게도 미디어를 통해 자주 노출되어 ‘제목은 몰라도 멜로디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유명한 곡이지요.
이 곡 ‘사제 차독’은 구약 성경 중 「열왕기 상권」에 등장하는 장면 즉, 솔로몬 왕이 사제 차독과 예언자 나탄으로부터 히브리 왕국의 임금이 됨을 상징하는 ‘기름부음’ 의식(※고대 히브리 왕국에서는 임금에 등극하는 자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어원 역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그리스어 ‘크리오’입니다.)을 행하는 제1장 39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 구절을 따와 장엄한 합창 형식의 곡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Zadok the priest
And Nathan the prophet
Anointed Solomon king
And all the people
Rejoiced, rejoiced, rejoiced
And all the people
Rejoiced, rejoiced, rejoiced and said:
God save the king
Long live the king
May the king live forever
Amen, amen, alleluia, alleluia, amen, amen
애당초 이 곡 자체가 대관식을 위해 작곡된 곡인 만큼 이보다 더 이날의 대관식에 더 잘 어울리는 음악은 없을 듯합니다. 이 합창곡은 성경 속 지혜의 왕 솔로몬과 마찬가지로 잉글랜드 왕 역시 신의 선택을 받은, 즉 기름부음을 받은 선택된 사람임을 선언합니다. 또한 온 백성이 새로운 왕의 등극을 찬양하고, 그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니 이 「사제 차독」은 그야말로 군주의 음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대 잉글랜드 왕들의 대관식이 열린 웨스트민스터 사원 합창단의 연주. 대성당에 울려 퍼지는 합창단의 힘찬 음성과 관현악 연주는 ‘장엄함’ 그 자체입니다.
이처럼 영국 왕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헨델에 의해 작곡된 이 곡이 200년이란 세월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잉글랜드 왕의 대관식에서 연주되고 있다는 것을 무덤 속의 헨델이 알았더라면 매우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아닌 게 아니라 이곳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헨델 유해가 보관된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왕과 왕족 그리고 영국에 지대한 공훈을 세운 이에게 무덤 자리를 내어주는데, 그 한편을 당당히 헨델이 차지한 것이지요. (※참고로, 왕족 외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유해가 안치된 유명인으로는 아이작 뉴턴, 찰스 디킨스, 찰스 다윈, 스티븐 호킹 등등이 있습니다. 18세기 당시 헨델의 클래스가 이 정도였습니다!)
두 시간이 넘는 길고 긴 대관식 의식도 이제 피날레를 향해 갑니다. 왕관을 머리에 쓴 엘리자베스 2세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왕족들과 성공회 주교단과 함께 퇴장하자 이번엔 영국의 국민 음악이라 할 수 있는 곡이 연주됩니다.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ilitary March)’이라는 우리말로 옮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곡입니다. 이 곡을 작곡한 사람은 우리에게 「사랑의 인사」로 더 잘 알려진 영국의 국민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입니다.
오늘날 영국 클래식 음악 저변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영국은 전 유럽에 이름을 날린 자국 출신의 스타 작곡가가 없다는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17세기에 활약했던 헨리 퍼셀을 제외하면 영국은 대단히 오랜 기간 스타 작곡가 기근을 겪었습니다. 베토벤, 모차르트, 비발디 등 불세출의 작곡가를 배출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는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고, 드뷔시, 모리스 라벨 등으로 대표되는 이웃 프랑스와 비교해도 영국은 유명 작곡가의 불모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런 콤플렉스를 당당히 해소시켜 준 이가 바로 엘가입니다.
우리에게 엘가는 그의 아내 앨리스에게 헌정한 「사랑의 인사(Salut D’Amour」가 가장 유명합니다만,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투영한 첼로 협주곡과 교향곡 등도 그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아 자주 연주 무대에 오르곤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그의 음악을 단 하나 꼽으라면 단연 이날 대관식에서 연주된 ‘위풍당당 행진곡’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좀 더 정확히는 총 5개 곡으로 이루어진 위풍당당 행진곡 중 ‘제1곡 D장조’가 유명합니다. 90년대 모 항공사의 TV 광고 배경 음악으로도 오랜 기간 사용되어 우리에겐 무척 익숙한 곡이기도 합니다.
이 곡엔 원래 가사가 따로 없었습니다만 곡 발표 이후 시인 아서 벤슨(Arthur Benson)의 시구절을 따와 가사로 만들었고, 가사를 붙인 상태에서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때 연주되었습니다. 그러니 가장 최근에 작곡된 대관식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희망과 영광의 나라(Land of Hope and Glory)」라는 제목 하에 붙은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Land of hope and glory, mother of the free,
How shall we extol thee, who are born of thee?
Wider still and wider shall thy bounds be set.
God, who made thee mighty, make thee mightier yet.
God, who made thee mighty, make thee mightier yet.
Land of hope and glory, mother of the free,
How shall we extol thee, who are born of thee?
Wider still and wider shall thy bounds be set.
God, who made thee mighty, make thee mightier yet.
God, who made thee mighty, make thee mightier yet.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한 대제국의 번영과 영광을 노래한 것인데,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잉글랜드 왕의 대관식 음악으로는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 입장에서는 썩 달가운 노래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노래가 전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국가적 예식과 각종 행사 음악으로 사용되면서부터인데, 특히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클래식 음악 축제 ‘BBC 프롬스(BBC Proms)’의 영향이 컸습니다. BBC 프롬스는 런던에 위치한 로열 앨버트(Royal Albert) 홀을 무대로 약 한 달 보름 여간 펼쳐지는 음악 축제로, 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정상급 연주자들이 이 무대에 오르기 위해 매년 여름 런던을 찾아옵니다.
이 축제의 백미는 마지막 날 펼쳐지는 “Last Night of the Proms”입니다. 이날은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주인공이 되어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들을 연주합니다. 영국 국가를 포함하여, 예루살렘(Jerusalem), 룰! 브리타니아(Rule! Britania)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이 위풍당당 행진곡도 결코 빠질 수 없습니다. 아니, 사실 이날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위풍당당 행진곡에 가사를 붙여 만든 「Land of Hope and Glory」를 이날 홀에 모인 관객은 물론, 로열 앨버트 홀 바로 길 건너에 위치한 런던의 명소 하이드 파크 야외무대, 그리고 영국 주요 도시 곳곳에 모인 수십만 명의 관객이 한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부르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BBC 프롬스 축제의 마지막 날은 모든 영국인들의 축제의 날이기도 합니다. 런던뿐만 아니라 영국의 주요 도시 전체가 들썩입니다. 원래 진지한 분위기의 클래식 음악 축제이지만 마지막 날만큼은 시끌벅적한 가운데 관객과 오케스트라가 하나 되어 축제를 즐깁니다.
이처럼 엘가는 이처럼 작곡가로서 또 지휘자로서 남긴 거대한 발자취 덕분에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부를 땐 존칭 Sir을 붙여, 에드워드 엘가 경(卿, Sir Edward Elgar)으로 불러야 합니다. 그가 만든 이 음악의 시작은 왕을 위한 대관식 음악이었지만 곡이 지닌 아름다움은 지극히 보편적이어서 모든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결국 제2의 국가(國歌)로까지 불리게 된 것이지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말미를 장식하는 음악으로 이 음악이 선택된 것이 의미심장합니다.이는 영국 왕실이 보편적인 영국 국민에 봉사하는 왕실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실제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공주 신분이던 1947년 남아공 순방길에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내 삶이 길든 짧든 내 평생을 그대들을 섬기는 데 바칠 것을 여러분 앞에서 선서합니다
(I declare before you all that my whole life whether it be long or short shall be devoted to your service.).”
여왕의 이런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영국이 전 세계에서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가장 많이 받는 군주제 국가로 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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