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인이 읽어주는 클래식 음악: 금지된 음악, 위대한 예술 혹은 죽음의 전주곡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금지곡’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노래방에서 남자친구가 부르는 임재범의 「고해」처럼 매우 사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금지곡도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금지곡들은 주로 정치적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은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일례로 우리나라도 과거 군사정권 시절엔 노래가사 중 억압에 저항하는 뉘앙스를 조금 풍기기만 해도 대중들 앞에서 연주하거나 들려줄 수 없는 곡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불행한 과거사 때문에 사회적 금기가 된 음악도 있습니다. 일본 대중가요가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유통 허가가 나기 시작한 것이 불과 2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면 요즘 세대들로서는 별로 실감이 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역사적 이유로 인해 존재하는 금기는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입니다만, 조금 독특하게도 우리에게 익숙한 클래식 음악을 금지곡으로 삼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유대 민족이지만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음악만큼은 오래 세월 ‘금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 지역에서 집행될 광고를 만든다면 그 광고엔 절대로 바그너의 음악이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된 배경엔 이 ‘바그너’라는 음악가의 생애와 그 뒤에 생긴 일련의 역사적 비극이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 리하르트 바그너(이미지 출처: Wikipedia)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 리하르트 바그너. 클래식 애호가 중 바그너를 ‘적당히’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광적으로 신봉하든지 아니면 철저히 혐오하든지. 

‘예술가’ 바그너는 의심의 여지없이 음악 역사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천재 중의 천재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가 창시한 관현악 수법은 이전의 그 어느 음악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독창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독창성은 이후 안톤 브루크너,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후대의 수많은 작곡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특히, 그가 창시한 장르인 ‘악극(Musikdrama)’은 그동안 유럽 극장 무대에서 주류를 이뤘던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페라와는 내용 면에서나 형식 면에서 확연히 차별화되는 독일 예술의 빛나는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악극 중에서도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바그너 개인뿐만 아니라 독일 오페라 역사를 통틀어 단연 최고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북유럽 신화를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트」, 「신들의 황혼」 등 4개의 작품이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개 작품 공연 시간을 모두 합치면 무려 16~17시간에 이르니, 「니벨룽의 반지」 전막을 보기 위해서는 나흘 저녁을 꼬박 투자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대서사극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 실로 놀라운 점은 이 엄청난 대작의 음악은 물론이거니와 대본까지 오로지 바그너 혼자 힘으로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오페라 작품은 작곡과 극본이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습니다. 베르디, 푸치니 같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오페라 대가들조차도 대본 작업만큼은 전문 작가에게 의지했습니다. 음악가에게 문학적 재능을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어불성설 같지만, 바그너는 그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냈습니다. 무려 20년의 세월을 꼬박 투자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니벨룽의 반지」를 보고 있노라면 이 대작이 한 인간이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빚어낸 작품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 바그너가 창조한 독일 오페라의 위대한 유산 중 하나인 니벨룽의 반지 중 제2야(夜)를 장식하는 작품 「발퀴레(Die Walküre)」. 장대한 스케일의 음악과 화려한 무대 효과가 압권인 작품이다. (출처: Deutsche Grammophon - DG)

반면, ‘인간’ 바그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습니다. 특히, 복잡한 이성관계로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켰지요. 일례로, 그는 망명 생활을 하던 자신을 돌봐주고 거처까지 마련해준 후원자의 아내에 연정을 품고 그녀와 금지된 사랑을 속삭였습니다. 이렇게 후원자의 뒤통수를 치는 와중에도 바그너는 자신의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해 그의 내연녀가 쓴 시(時)에 곡을 붙여 대단히 아름다운 연가곡(連歌曲)을 작곡합니다. 시를 써서 바그너에 바친 이 여성의 이름은 마틸데 베젠동크. 그 유명한 「베젠동크 가곡(Wesendonck Lieder)」에 베젠동크란 이름이 붙은 까닭입니다. 바그너의 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환갑을 바라보던 1870년, 바그너는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젊은 아내를 꾀어 그녀와 결혼까지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코지마 리스트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자 프란츠 리스트였는데, 딸의 이혼과 재혼에 분노한 나머지 친구였던 ―그러나 이제는 사위가 된― 바그너와 절교하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사생활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도 바그너 비판의 주요한 근거가 되는 것은 그의 왜곡된 인종관과 이데올로기입니다. 

생전에 바그너가 지독한 반(反) 유대주의자였다는 증거는 이미 여러 문서와 그의 편지 등에서 발견된 바 있습니다. 그의 저작 「음악 속의 유대적 성향(Das Judenthum in der Musik)」에서는 유대인이자 당대의 라이벌 음악가였던 멘델스존과 마이어베어를 맹비난했고, 더 나아가 ‘유대인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라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젊은 시절 가난한 무명 음악가였던 바그너가 당시 강력한 문화권력을 쥐고 있던 유대인 출신 음악가들에게 받았던 설움과 분노가 인종 혐오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그너가 살아있는 동안 유대인을 직접 박해하거나 차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된 것은 바그너가 죽고 난 뒤 태어난 그의 열렬한 신봉자, 바로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바그너 사후 6년 뒤 태어난 히틀러는 바그너의 민족주의 사관과 게르만 신화 속 영웅을 소재로 한 악극에 심취해 그의 열렬한 신봉자가 됩니다. 바그너의 음악과 민족주의 사상을 나치즘과 접목하려 한 것이죠. 독일 민족의 위대함을 바그너의 예술을 통해 선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독일은 바그너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은 뒤에는 아예 정부 차원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공식적으로 지원해주었습니다. 덕분에 바그너 일가와 그 후손들은 히틀러와 매우 친밀한 교분을 쌓았습니다.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을 영화화한 「작전명 발키리」를 보면 히틀러가 얼마나 대단한 바그네리안(Wagnerian, 바그너 추종자)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암살 모의의 주인공 슈타우펜베르크 대령(톰 크루즈 분)이 히틀러에게 발키리(발퀴레의 영어식 발음) 작전계획 승인을 받는 장면에서 히틀러는 진지하게 이렇게 묻습니다.

“자네 바그너를 잘 아는가? 바그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치즘도 이해하지 못하더군.”

이처럼 바그너 음악에 심취했던 히틀러는 광적으로 바그너의 음악을 즐겨 들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의 친필악보까지 모조리 모아 2차 세계 대전 중 자신의 안방이자 지휘소 역할을 한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독일 패전 직전 이 지하 벙커가 폭격을 받으면서 바그너의 친필 악보 역시 나치 독일 패망과 함께 소실되어 버렸습니다.)

 

▲ 영화 ‘작전명 발키리’ 중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히틀러의 여름 별장인 켈슈타인하우스를 방문해 작전계획을 승인받는 장면에서 히틀러는 바그너를 언급하며 그의 예술과 나치즘을 동일시한다. 발키리는 바그너의 작품 ‘발퀴레’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출처: FoxxySphinx 유튜브)

홀로코스트의 현장인 폴란드에 설치된 유대인 수용소에서는 언제나 바그너의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수감 유대인 중 음악을 했던 사람들을 따로 모아 바그너 음악을 연주하게 했던 것입니다. 수용소에서 근무하던 독일군 장병들을 위한 일종의 유희였습니다. 수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유대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독가스실로 끌려가면서 악극 ‘탄호이저(Tannhäuser)’ 중 ‘순례자의 합창’ 같은 바그너의 음악을 강제로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바그너의 음악은 ‘수용소 음악’ 입니다. 끔찍한 죽음의 기억에 조건화된 음악입니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종전 7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거나 방송하는 것은 금기사항으로 여겨집니다. 법으로 명문화되진 않았지만 누구도 해서는 안 되는 이스라엘인 간의 암묵적 약속입니다. 몇 년 전엔 이스라엘 공연 라디오 방송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틀었다가 청취자들의 엄청난 항의를 받고 방송국 측이 공식 사과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TV 광고에 바그너의 음악이 나온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금기를 깬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지난번 소개해 드린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입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유대인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고, 이스라엘 건국 초기인 1952년엔 아예 가족이 이스라엘로 이주해서 살았습니다. 유대 혈통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음악가의 사상이나 국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나 봅니다.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고, 지금은 금세기 최고의 바그너 스페셜리스트로 불리고 있습니다.

관련 글 ▲광고인이 읽어주는 클래식 음악: 음악은 인류애를 증진시킬 수 있는가?

2001년, 바렌보임은 대형사고를 칩니다. 자신이 이끌던 베를린 슈타츠카펠레(Staatskapelle Berlin)와 함께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찾은 바렌보임이 예정된 연주 프로그램을 마친 뒤, 기습적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한 소절을 앵콜곡으로 연주한 것입니다. 당국에 미리 알릴 경우 연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저지른 일입니다. 그는 앵콜곡 연주에 앞서 미리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객석은 일순간 술렁였습니다. 여기저기서 항의하는 고성이 들렸고,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한 노인은 아예 바렌보임을 향해 자신의 상흔을 보여주며, “바그너의 음악은 죽음의 음악”이며, “이스라엘 땅에서 바그너를 연주할 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에 바렌보임은 “음악계에 바그너가 미친 영향이 너무도 커서 더 이상 외면할 수만은 없다. 음악은 음악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이야기한 뒤 연주를 강행해 버립니다. 이 사건은 그야말로 이스라엘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의회는 성명을 내고 “바렌보임이 사과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문화 기관은 그를 배척하며, 문화적 기피인물로 선언해야 마땅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바렌보임의 항변이 걸작이네요.

“사과? 바그너를 엉터리로 연주했다면 사과할 용의가 있다”

 

▲ 현존하는 최고의 바그너 스페셜리스트 중 한 명인 다니엘 바렌보임. 바그너의 음악은 인종과 국경을 뛰어넘는 위대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출처: DW Classical Music)

바그너가 자신의 악극을 연주하기 위해 만든 바이로이트 극장에서는 매년 그의 음악과 악극을 무대에 올리는 바이로이트 페스트벌(Bayreuther Festspiele)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페스티벌엔 독일인 관객 다음으로 많은 수의 이스라엘 관객들이 자리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이로이트 제2의 언어는 히브리어라는 이야기까지 들립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도 2세대나 지난 시점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찌됐든 같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국경 안과 밖에서 바그너에 대한 인식에 온도 차가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직도 이스라엘에서 바그너는 금기입니다만 이스라엘 악단이 외국에서 바그너를 연주하는 시도도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 철학자 레오 슈트라우스는 “히틀러가 좋아했던 것이라고 하여 반드시 싫어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바그너로서는 조금 억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본인은 나치즘이 생기기 전에 이미 죽고 세상에 없던 사람인데 왜 비난의 화살이 자신을 향하는지. 히틀러가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을 바그너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가족, 친구가 처참히 죽어가는 가운데 들어야만 했던 음악을 다시 듣고 싶지 않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게다가 바그너가 생전 반유대주의 혐의가 짙은 사람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바그너의 음악은 정녕 위대한 예술일까요, 아니면 죽음의 전주곡일까요?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