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엔 몇 달을 방치한 책들이 두서없이 쌓여 있습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 중엔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도 보입니다. 가급적 짧은 편지를 쓰리라 마음먹습니다. 퇴사 초범도 아닌데 무슨 놈의 긴 이야기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은퇴할 나이에 은퇴도 안 하고 또다시 씨를 뿌리러 가는 마당에 사무치는 정념을 토로하기도 머쓱합니다. 회사란 그냥 좋은 추억이 많이 있을 때까지 머무르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더 그리워질 테니까요. 너무 오래 정박해 있는 배는 항해하는 법을 잊게 될 것 같다는 생각도 저를 밀어냅니다. 갈매기들 놀이터가 되기 전에 말이지요... 그렇게 다시 떠날 채비를 합니다.
삶은 하염없는 항해일 따름입니다. 욕망의 항해고 사유의 항해고 구도의 항해고 이상의 항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항해입니다.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영원히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문득 E. 퀴블러 로스 여사의 조언이 떠오릅니다. ‘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불행이 아니고, 불행한 것은 이를 수 없는 별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겨울 바다가 춥습니다. 그래도 희뿌연 입김을 내뿜으며 씩씩하게 짐을 싣습니다. 저 멀리 별 하나 반짝입니다. 다들 고마웠습니다.
2020. 12. 1 이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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