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힘은 또 다른 스토리를 만드는 데 있습니다. 강력한 인상을 준 스토리는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스로 새로운 스토리로 자라납니다. 얼마 전, 배우 다니엘 헤니가 자신의 반려견과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사진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조금 다른 포인트에서 자라납니다. 다니엘 헤니와 함께 살고 있는 반려견은 식용견으로 사육되다 도축되기 직전 구조된 아이라는 점입니다. 그 사연은 아직도 비윤리적으로 사육되고 있는 개들의 이야기로 자라나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좀처럼 입양되기 어려워 해외로 건너가는 대형견들의 이야기로 자라나기도 합니다.
누구나 한 번씩은 봤을 법한 코에 빨대가 박힌 거북이. 그 거북이는 전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켜 환경 문제를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이야기는 더 나아가 거북이의 코에서 빨대를 꺼내는데, 8분이라는 긴 사투를 벌여야 했으며 수많은 해양 동물들이 버려진 플라스틱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사연으로 이어집니다. 세계적인 커피 체인점은 그래서 빨대가 없는 컵을 개발했고, 종이 빨대를 쓰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
이렇듯 강한 스토리는 스스로 자라나는 힘이 있습니다. 브랜드의 잘 만들어진 스토리 또한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여운을 남기고 매해 기다리게 하는 힘도 지니게 해주죠.
램프는 정말 감정이 없는 걸까요?
수많은 히트 광고를 만든 이케아. 이케아는 2002년 유난히 슬퍼 보이는 램프를 선보였습니다. 비 오는 날 길가에 잔인하게 버려진 램프. 고개 숙인 램프는 인생을 비관하듯 슬퍼 보였고, 세차게 내리는 비는 램프의 운명을 더 가혹해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는 여자가 다시 내려가 램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은 안타까운 순간, 내레이터는 냉정하게 얘기했죠.
“누구나 이 장면에서 슬픔을 느낄 거다. 하지만 그건 당신 감정이 잘못된 거다. 램프는 감정이 없고, 헌 램프보다 새것이 훨씬 좋다.”
마치 램프가 눈물을 떨구듯 빗물이 램프를 타고 흘렀지만 내레이터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이 광고는 칸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케아는 온 힘을 다해 램프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으니까요. 16년이 지난 2018년, 이케아는 램프를 다시 살렸습니다. 이야기의 속편을 만들었습니다.
광고는 다시 램프가 버려진 길가로 갑니다. 밤새 비를 맞았던 램프는 버려진 곳에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 램프에게 다가오죠. 작은 소녀입니다. 소녀는 램프의 고개를 바로 세워주고, 수레에 태운 후 집으로 향합니다. 다행히 쓰레기차에 실려 폐기되는 위기를 모면합니다. 소녀의 집으로 간 램프는 새 삶을 삽니다. 깨끗한 전구를 다시 끼우게 되고, 매 순간 소녀와 함께하는 행복한 순간을 살아갑니다. 램프는 다시 행복해 보입니다. 이 때 램프에는 감정이 없다고 차갑게 얘기하던 내레이터가 나타나 말을 바꿉니다.
“누구나 이 램프를 보고 행복을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그 감정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재활용은 매우 좋은 거니까요.”
램프는 감정이 없으니, 냉정하게 새 램프를 장만하라던 이케아가 이젠 재활용을 권합니다. 2002년엔 새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지만, 날로 환경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16년 후의 지금은 재활용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합니다. 강력했던 2002년의 이야기가 16년이 지난 지금 다시 힘을 얻고 있습니다.
AI는 정말 당신을 편하게만 할까요?
AI는 이제 우리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굳이 하이 테크놀로지 기기를 들여놓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AI 스피커 하나쯤은 집에 두고 말을 겁니다. 검색해보는 노력조차 필요하지 않은 시대로 가고 있는 거죠.
노르웨이 슈퍼마켓 체인 REMA 1000은 그런 AI가 틀렸다고 말합니다. 영상은 AI가 없으면 하루라도 못 살 듯 보이는 남자의 아침으로 시작됩니다. 남자는 말 한마디로 음악을 틀고, 스무디를 갈고, 일정을 확인하고, 불을 끄고 문을 엽니다. 남자가 한 일이라곤 명령한 것 밖에 없죠. 다소 허세를 부리는 듯 남자는 유유히 외출을 해, AI가 알려준 스케줄대로 치과 치료를 받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기치 않은 문제가 시작됩니다.
치료로 발음이 부정확해진 남자는 비 오는 추운 오후에도 문을 열지 못합니다. 아무리 힘차게 ‘문을 열라’고 외쳐도 AI는 남자의 발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까스로 집으로 들어온 남자는 비에 젖어 추위에 떨면서도 난로 하나 켜지 못합니다. AI가 남자의 부정확한 발음을 연신 잘못 알아듣기 때문이죠. 난로를 켜라는 명령을 볼륨을 높이라는 말로 알아듣고, 음악 소리를 키웁니다. 이 순간, REMA 1000은 ‘단순한 게 최고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모든 것을 대량으로 갖추고 대량 판매하는 슈퍼마켓과 달리, REMA 1000은 꼭 필요한 물건만 갖춰놓고 저가로 판매하기 때문이죠.
REMA 1000은 AI가 편리한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건 단순한 거라는 논리를 폅니다. 어쨌든 하이테크를 맹신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어볼 수도 있는 얘기이기에 메시지에 힘이 더해집니다. 광고에서 보던 수많은 첨단 AI의 숨겨진 이야기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일찍 찾아온 존 루이스 광고
언젠가부터 크리스마스는 존 루이스 광고로 시작됩니다. 매년 이어지는 크리스마스 동화를 보듯 런던의 백화점, 존 루이스는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 내니까요. 하지만 올해 광고는 일찍 찾아왔습니다. 이례적으로 9월 초에 광고를 집행했습니다.
백화점 브랜드인 존 루이스는 마트 브랜드인 웨이트 로즈와 처음으로 합작하여 메시지를 만들었습니다. 목표는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시즌 마케팅이 아닌, 새롭게 리뉴얼된 기업의 파트너십을 강조하기 위한 광고입니다. 기업은 직원들에게 지분을 나눠줘 모두가 주인인 파트너로서 출발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광고에 등장하는 82명의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공연을 만듭니다. 직접 나와서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아이 외에 소리를 만드는 아이, 조명을 비추는 아이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공연을 만드는 모습입니다. 영상은 퀸의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해 웃음을 줍니다. 비록 크리스마스적인 동화는 아니지만 여전히 귀여운 아이들이 등장해, 잘 짜인 아이들만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여줍니다.
존 루이스는 “당신이 어떤 것의 일원이 될 때, 그곳에 더 진심을 다하게 됩니다.”라며 파트너십으로 좀 더 좋아진 존 루이스와 웨이트 로즈를 약속합니다.
혹자는 점점 경기가 안 좋아진 데다 직원을 해고하기까지 한 존 루이스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이 광고를 만들어낸 것을 혹평하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라는 시그니처를 가진 존 루이스가 이 광고로 얼마나 더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는 더 두고 봐야 하지만, 어쨌든 존 루이스만의 색깔을 잘 지켜낸 이야기입니다. 다만 이걸로 존 루이스의 올해 크리스마스 스토리는 끝났다는 데 아쉬움이 남긴 합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스토리
훌륭한 예술작품은 그 작품을 만난 순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삶 속에 다시 나타나 추억이 되기도 하고 위로와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여행하다 들은 음악이, 불현듯 일상에 찾아와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고, 아직도 여행하는 듯 감정을 되살려주는 것처럼.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 예술과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유명한 작품에서 ‘내가 그 때 그 마음으로 본 작품’이 되고, ‘그 때의 나를 움직인 작품’이 되니까요. 내 이야기가 얹어진 나만의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브랜드도 이야기가 탄탄해지면 소비자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만들어내고 ‘나만의 브랜드’로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마케터들은 때론 스토리텔링에 집중합니다. 16년 전의 이야기를 영리하게 현대 시점으로 풀어낸 이케아처럼, 좋은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도 힘을 지니니까요.
브랜딩은 결국 유니크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지어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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