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5일
숲 속을 걷는다. 어디서부터 불어왔는지 모를 바람이 코 끝을 스친다. 지난 밤에 내린 비로 솔향이 뚜렷하다. 촉촉한 흙의 냄새와 버무려져 더 없이 향긋하다. 심호흡을 몇 번 하니 지친 뇌에 산소가 주입되고 온 몸이 깨어나면서 오감이 활어처럼 펄떡거리기 시작한다. 생명체로서의 자각은 몸의 자각에서 비롯됨을 느끼는 순간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 몸의 역동에 귀 기울이려고 하니 저절로 눈이 감긴다. 아름다운 고요다. 몸은 하나의 세계이며 다른 세계와 세계를 연결시키고 영혼을 자라게 하는 집이다. 한 인간의 발전은 몸에게 좋은 것들을 선물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 간단한 진리를 처박아 둔 채 잘난 척을 했으니 거렁뱅이 삶을 산 느낌이다. 눈에게 귀에게 입에게 손에게 발에게 뇌에게 위에게 폐에게 좋은 것들을 주고 그것들이 좋은 짓들을 하게 함이 몸의 주인 된 도리라면, 나는 도리를 다 하지 않고 살았던 셈이다. 아니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어폐가 있다. 몸과 자아를 분리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몸은 영혼의 거주지도 아니고 영혼은 몸의 주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몸이 자아고 자아가 몸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데카르트와 싸우자는 것으로 오해 할 것 같은데, 그럴 의도로 눈을 부라릴 일은 전혀 생기지 않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나에게 그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어쨌든 현대를 지배하는 이 오래된 이원론 보다 몸에게 모든 권력을 주고 싶은 것이 지금의 입장일 따름이다. 의식이라든가 마음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다 인간이 지어낸 허무맹랑한 허구이며, ‘모든 것은 몸으로부터’를 주장하는 메를로-퐁티에게 온몸을 던져 구원을 받고 싶은 심정이라는 얘기다. (또 언제 다른 편으로 전향할지 그 때 되면 또 뭐라 말할지 걱정이긴 하지만.)
도랑을 건너니 오밀조밀한 오솔길들이 꼬불꼬불 나 있고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발이 가자는 데로 간다. 땀에 젖은 얇은 면티가 살갗에 닿아 촉촉해지는 느낌을 전해준다. 가슴팍에 손을 넣어 흥건히 젖은 땀을 만져본다. 내 몸이 만들어낸 액체다. 왜 그동안 한번도 ‘내 몸이 나다’라는 사실을 응시하지 않았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가장 가까이 있는 나인데. 살아있는 나인데. 그것이 전부인데. 나는 그동안 무엇을 보았던 것인가. 오솔길의 끝에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 나무 의자가 길을 지키고 있다. 짙은 쵸코렛색의 의자는 벤치도 아니고 그네도 아닌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 숲길에서는 이상하지 않게 잘 어울렸다. 아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자에 등을 기댄다. 나는 눈을 감고 몸으로서의 나를 다시 소환해 본다. 말초신경까지 피의 흐름이 느껴지고 맥박이 느껴지고 온갖 감각이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아 이것이 ‘나’이구나. 분명 한 ‘나’이구나.
봄부터의 강행군으로 몸에 몇 가지 병이 드니 그제서야 내가 육체를 갖고 있는 생물체였음을 깨달았다. 마음을 다루는 기술자라는 나의 직업관이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했었는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마음이라는 것도 결국은 몸의 현상이다. 몸을 다스리는 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인생의 2막이 시작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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