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fference Trend
독설의 패러독스
독설 하지 말라는 것 아니다. 할 때는 하자. 적어도 있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최종 목표는 생명을 살리는 데 두고, 퍼붓자면 여름날 소나기처럼 퍼붓자. 이것이 독설의 패러독스이다.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 이렇게 가슴 찡한 미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감통(感通)’편의 가장 마지막 조인 ‘정수사 구빙녀(正秀師救氷女)’이다.
‘제40대 애장왕 때였다. 승려 정수(正秀)는 황룡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겨울철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다. 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지나는데, 문밖에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었다. 이에 옷을 벗어 덮어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거적때기로 몸을 덮고 밤을 지새웠다. 한밤중 왕궁 뜰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황룡사 사문 정수를 꼭 왕사(王師)에 앉혀라.” 급히 사람을 시켜 찾아보았다. 사정을 모두 알아내 아뢰니, 왕이 엄중히 의식을 갖추어 궁궐로 맞아들이고 국사(國師)에 책봉했다.’
승려 정수의 선행이다. 애장왕 때라면 저물어가는 시대이다. 신라 제일의 사찰 황룡사에 속했지만, 말단의 일개 승려였던 정수가 했던 선행은 기실 <삼국유사>가 보여주고자 한 신라 사회 말기의 어둠 속 빛이었다. 여분의 옷 한 벌 없이 살아가는 한 승려가, 돌아가 덮을 이부자리 하나 없는 처지에 입고 있던 옷을 몽땅 벗어 주고 알몸으로 달려가거니와, 그 순간이 바로 신라 사회의 고갱이었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어려운 시대의 선행은 더욱 빛나는 법이다. 나는 여기서 ‘한밤중 왕궁 뜰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는 대목에 주목한다. ‘하늘의 소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기록과 맞물려 생각나는 일이 있다.
미담은 가끔, 독설은 날마다
지난해 9월, 인터넷에 올라온 매우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화제가 됐다. ‘1인 시위하는 장애인 위해 1시간 동안 우산 받쳐준 경찰’이라는 제목이었다. 국회 앞에서 경비 업무를 서는 전 모 경위는 태풍주의보가 내렸기에 우비에다 우산을 들고 나갔는데, 비를 맞으면서 ‘중증 장애인에게도 일반 국민이 누리는 기본권을 보장해 달라’는 내용의 피켓을 든 한 장애인을 발견했다. 전 경위는 이 장애인에게 다가가 ‘태풍 때문에 위험하니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장애인은 ‘담당하는 날’이라며 거절했다. 전 경위는 하는 수 없이 우산을 건넸는데, 장애인은 몸이 불편해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그러자 전 경위는 장애인 뒤로 걸어가 우산을 받쳤다. 두 사람은 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태풍 속에 서 있었다. 마침 이 곳을 지나가던 네티즌이 이 장면을 찍어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다. ‘국회 앞 비 오는데 장애인 1인 시위, 우산 받쳐주는 경찰’이라는 글과 함께 수없이 리트윗 되면서 화제가 됐다.
화제가 되는 일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를 통해 자주 접한다. 그것이 미담이냐 추문이냐, 선행이냐 악행이냐의 양상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 따르는 댓글이 여론 형성의 기능을 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낳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 (경찰관을) 경찰서장 시켜라”는 댓글이 인상적이었다. 앞서 소개한 <삼국유사>의 이야기와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비오는 날의 경찰과 비 맞는 장애인은 눈 오는 날의 스님과 얼어 쓰러진 모녀에서 묘한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것은 ‘SNS의 댓글’과 ‘하늘의 소리’이다. ‘경찰서장 시켜라’와 ‘왕사에 앉혀라’가 비슷한 울림을 가지고 읽힌다.
이는 둘 다 ‘여론의 형성’이라는 기능을 보여주면서 더할 나위 없는 미담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것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독설이 자리한다. SNS 같은 오늘날의 소통 공간에서는 선행의 미담이 오가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독설이 난무한다. 미담은 언제나 가끔이요, 독설은 날마다 횡행하고 있다.
‘장자 스타일’의 독설은…
독약은 생명을 죽이는 약이다. 그러나 독도 약이 될 때가 있다. 아니 세상의 모든 약은 사실 독이다. 그런데도 약이 되기로는 그것이 생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에 달려 있다. 생명을 죽이면 독약이요, 생명을 살리면 독도 약이 되는 법이다. 말 또한 마찬가지이다. 독설은 생명을 죽이는 말이다. 그러나 독도 약이 되는 것처럼 독설 또한 약이 될 때가 있다.
우리는 흔히 ‘독설을 퍼붓는다’고 한다. ‘독설’이라는 말에는 ‘퍼붓는다’가 어울린다. 독설에는 미운 감정이 응어리져 있기 때문이다. 차분히 한두 마디 해가지고는 독설에 맞지 않다. 원망과 저주를 가득 담아 쏟아내야 독설은 독설답다.
이런 독설이 약이 될 때란 어떤 경우인가. 서러운 일을 당한 자가 독설을 퍼부어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분이 풀린다면 약이다. 잘못된 길을 가는 자가 독설을 듣고 행실이 고쳐진다면 약이다.
<장자>에 나오는 아주 점잖은 독설 한 마디 들어보자. 장자는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이 생긴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논쟁이 이어져 이기고 지는 결과가 나왔더라도, 이긴 쪽이 언제나 옳고 진 쪽이 틀렸다고만 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 제3자를 불러 누가 옳은지 가려보자고 할 것이다. 장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당신과 입장이 같은 사람에게 판단을 시킨다면 그는 당신과 같으니까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없소. 나와 같은 사람에게 시키면 그는 나와 같으므로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게 되오.”
제3자는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또한 어떤 의견을 가진 한 존재일 뿐이다. 거기서 절대적인 중립의 판단이 나오길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착각이다. 그러므로 착각하지 말라는, 장자 스타일의 독설이라면 독설이다. 이런 독설은 약이 된다.
독설 퍼부어라! 단, 착각하지 말고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독설이 다만 독이 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근거 없이, 또는 불확실한 것을, 누가 다쳐도 상관없다는 듯이 내뱉는 말이 독이다. 독설은 어느 시대 어느 세상에나 있었지만, 오늘날은 일파만파 그 파급력이 엄청나서 무엇보다 그것이 걱정이다.
바로 SNS와 같은 수단을 통해서이다. 다만 독이 되는 독설이 옛날보다 수백 수천 배의 범위와 속도로 퍼져나가는데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상황이다. 정의감에 사로잡혀 해대는 ‘신상 털기’라는 해괴한 놀이도 마찬가지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피해자이기에 ‘신상’이 감춰져야 하는 사람에게조차 무차별로 가해지는 이 ‘놀이’는 폭력이다.
공인의 독설은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정치인의 독설을 떠올려 보자. 누군가를 향해 ‘권력만 주면 신발 벗겨진 줄도 모르고 냅다 뛰어가는 수많은 정치적 창녀에 불과할 뿐’이라는 독설을 퍼부은 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국 자기편을 치는 부메랑이 되고 말았다.
문제를 파악했으니 해결책을 찾는 일이 급하다. 매우 폭넓고 근본적인 대책이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선 고칠 수 있는 우리의 마음 자세만큼은 그렇게 어렵거나 시간이 걸릴 리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독설 하지 말라는 것 아니다. 할 때는 하자. 적어도 있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최종 목표는 생명을 살리는 데 두고, 퍼붓자면 여름날 소나기처럼 퍼붓자. 이것이 독설의 패러독스이다.
고운기 ㅣ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연세대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대 방문연구원과 메이지대 객원 교수를 거쳐 현재 한양대 문화콘텐츠 학과 교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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