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술에 나타난 우리의 전통문화
비록 예술작업을 한다는 마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으나 보자기를 만드는 동안 여인네들은 예술가가 창작을 할 때 갖는 몰아의 희열을 느꼈을 것이며, 이러한 순수 창작의
기쁨은 폐쇄된 규방에서만 머물러야 했던 여인들의 답답함을 정화시켜 주었을 것이다.
미술은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다. 일상에서 부딪치는 텔레비전·잡지 등의 대중매체뿐 아니라 거리의 간판·전광판 광고에 이르기까지 미술이 개입되지 않는 곳이 없다. 즉 미술은 우리의 일상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오늘날 박물관 안에 오도카니 모셔놓고 있는 우리의 고미술품 역시 그 시대에 우리 조상들의 일상 안 어디쯤에 있었던 것이며, 나아가 조상들의 내면 감정이나 느낌·정서들을 시각적인 매체로 표현한 하나의 고유한 가치체계인 것이다. 결국 고미술품은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모습과 정신세계·문화를 읽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자연을 품어라 : 무기교의 기교
한국 전통문화는 ‘자연미’를 떠나서 얘기하기는 힘들다. 일상을 떠난 자연이 아니라 일상 안에 스며든 자연이다. 형식화·양식화된 자연이 아닌, 다소 거칠지만 소박한 ‘고졸한 미’를 추구한 자연이 우리 문화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곡선에, 한옥의 창호지 문틈 사이로, 그리고 서민들의 밥상 위 옹기와 막사발 안에서도 우리는 자연과의 소통을 시도한 한국 문화의 고유한 자연미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자연과의 소통은 우리 전통 그림을 비롯한 예술 전반에서 정신적인 것을 중시하고 기교를 중시하지 않는, 나아가 기교를 뛰어넘는 ‘무기교의 기교’에 이르게 된다. 잘생긴 모양이 둥근 보름달을 닮았다 하여‘ 달항아리’라 불리는 조선 백자에서도 우리는 자연을 작품 안에 그대로 옮겨놓고자 한 우리 선조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비대칭의 외형은 그 시대 문화 엘리트들이 추구한 대상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고자한 그들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외부에서 요구하는 규정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자연의 다양한 품새를 끌어안은 ‘무기교의 기교’는 한국미를 얘기할 때 중요한 미학적 근거가 된다.
국보 309호 <백자 달항아리> 국보 310호 <백자 달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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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해학을 통해 바라본 민중의 정서 : 풍속화
조선 전기의 회화는 대부분 자연주의 사상에 따라 실물보다는 자연이 우선시되었다. 그래서 인물을 그리더라도 자연의 일부로 묘사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실사구시의 학문인 실학이 발달하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해지고 생활 속의 꾸밈없는 감정표현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그림이 우리 역사상 가장 한국적이고 민족적인 화풍을 보여주는 풍속화이다.
어느 시대이든 민초는 고단한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 삶은 항상 그들을 고단하게 했지만 민초들은 양반과 기득권 세력을 향한 해학과 풍자를 통해 그 고단함을 이겨내며 살아왔다. 이러한 우리 민중의 정서와 일상을 담고 있는 것이 풍속화이다. 조선 풍속화의 대표적인 화가 김홍도의 그림 <타작>은 당시의 마름과 소작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 안에는 당시 신분제의 모순과 계층 간의 갈등이 은근하게 풍자되어 있다. 바쁜 수확기에 소작인들은 노동요를 부르는 듯 입이 벌어져 있고, 얼굴은 노동의 고단함이 아닌 수확의 기쁨으로 환하다. 반면에 이들을 감시하는 마름은 낮술 한 잔 하셨는지 삐딱하게 쓴 갓하며 바르게 놓이지 않은 신발이 무료함을 넘어 그의 게으름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그림 속 우리 서민들의 순박한 감성은 신랄하거나 직설적이 아닌 해학과 풍자로서 은근하게 드러나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 사립문 앞에서 짚신을 삼고 있는 서민의 모습을 담고 있는 김득신의 <여름날의 짚신삼기>에서도 민초의 곤궁한 삶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림 속 인물들의 모습에선 비애가 아닌 어려운 세상살이를 달관한 여유와 현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 민족의 해학성을 느낄 수 있다.
김홍도 <타작> 김득신 <여름날의 짚신삼기>
이름 없는 조선 여인들의 창조적 에너지 : 자수와 보자기
조선 여인네들은 닫혀있는 규중 안에서 일상적인 애환을 반추했다. 사랑방에서는 정치 이야기가 꽃피어도 규방에서는 그날이 그날인, 매일 똑같은 답답한 세월의 연속이었다. 몇몇 지적인 배움이 가능했던 여인-<경국대전>에 의하면 하층 출신의 기녀만이 사내를 상대하기 위해 예능훈련을 받을 수 있었으며, 또한 엄격한 내외법에서도 제외되었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여인네들의 창조적인 에너지는
오로지 바느질과 자수 속에서만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민간풍습으로 칠석날 밤에 여인이 바늘 한 쌈을 준비하고 달빛 아래에서 실이 단번에 바늘귀에 꿰어질 때까지 계속하여 가장 먼저 실이 꿰어진 바늘을 잘 간직했다가 시험 보러 가는 자식의 옷 등 쪽에 몰래 꽂아주면 합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바느질과 매듭은 폐쇄 행위(바느질과 매듭은 공간을 막는 행위이다)이므로 출생이나 저승길을 트는 상중과 같은, 개방성을 요하는 시기에는 피했다. 그래서 동네에 초상이 났을 때 바느질을 하면 그 혼령이 원귀가 되거나 바느질하는 이에게 저승길을 같이 가자고 한다고 믿었다. 또한 수의를 만들 때에는 회생의 염원을 담아 실의 매듭을 짓지도 않았고 뒷바느질도 하지 않았다.
이름을 내세워본 적이 없는 어느 여인네의 바느질 솜씨가 담겨있는 보자기를 보고 있으면 자투리 천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놓은 우리 여인네의 검소한 정서를 알 수 있는데, 특히 어느 현대 미술품보다 더 현대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보자기에는 기복 신앙적인 요소도 있다. 대상에 공을 많이 쏟는 것은 치성을 드리는 행위이며, 치성을 드린 대상은 복을 부르는 매체가 된다고 믿었다. 수를 놓거나 조각 천을 하나하나 이어 붙이는 등 보자기를 공들여 만드는 것은 복을 비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정성들여 만든 보자기에 물건을 싸두는 것은 복을 싸둔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각종 예물을 싸던 혼례용 보자기가 그 대표적인 예다.
비록 예술작업을 한다는 마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으나 보자기를 만드는 동안 여인네들은 예술가가 창작을 할 때 갖는 몰아의 희열을 느꼈을 것이며, 이러한 순수 창작의 기쁨은 폐쇄된 규방에서만 머물러야 했던 여인들의 답답함을 정화시켜 주었을 것이다. 아는 듯하지만 잘 모르는 것이 우리 전통문화이고 문화유산이며, 고미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통문화, 미술과 말을 트고 낯을 익히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고궁 속에 남아있는 전통의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또 우리어머니의 반짇고리 함을 한번 열어 보는 것으로도 우리의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사임당 <초충도 자수> 보자기
이지성
서울여자대학교 조형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IESA학교에서 현대미술시장을 전공했다. 파리에서 큐레이터로 활동. 현재는 아트디렉터로 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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