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9-10 : 광고와 문화 - 썰렁한 언어유희 - 차려진 밥상 위의 맹물 그릇들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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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시인, 상지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썰렁한 개그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시중에 흘러 다니는 개그들은 촌철살인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널널해 보이는 외양을 들치고 보면, 그 아래에는 사회 지배 계층에 대한 서민들의 날카로운 풍자가 유쾌한 형식으로 담겨 있었다.

7,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은 ‘참새와 쥐 시리즈’를 기억하고 있다. 서민들은 가장 힘없는 동물을 등장시켜서 당시의 억압적인 사회적 정황을 효과적으로 풍자했던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참새는 시키는대로 따라하다가 희생되는 고지식한 약자의 역할을, 쥐는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꾀를 내어 강자를 속여 넘겨 강자의 횡포를 따돌리는 영악한 약자 역할을 주로 연기했던 것 같다.

그 시리즈는 끝날 생각을 하지 않고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오죽했으면, 끝물에는 이런 조크까지 나왔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참새와 쥐가 광화문 네거리에 모여서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했대. 플래카드에 뭐라고 쓰여져 있었는지 알아?” “몰라.” “‘우리를 수수께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쓰여 있었대.” 그러나 그 후에도 참새와 쥐는 죽지 않았다. 이 조그만 짐승들은 그 ‘데모’ 이후에도 계속 전선 위에 앉아 포수의 총에 맞아 죽거나, 뒷골목에서 고양이를 속여 넘기며 시중을 돌아다녔다.

그 후에도 그런 시리즈들은 많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조크들이 언제부터인가 점점 ‘썰렁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조크들은 여전히 7, 80년대에 시중에 흘러다니던 조크들처럼 정치, 사회적인 현상을 풍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이 시리즈들은 별반 의미도 없고, 조크가 구성되는 방식도 제멋대로이다. 어떤 방식으로도 일정한 법칙을 찾을 수 없는 방식으로 조크가 이루어진다. 어떤 때는 발음의 유사성을 가지고 장난을 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상황과 전혀 동떨어진 기괴한 행동을 집어넣어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고, 또 이도 저도 아닌, 무엇이라고 꼬집어 정의할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문맥을 해체시켜버리기도 한다.

최근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삼행시 짓기’는 더더욱 썰렁한 것 같다. 아무렇게나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인다. 심지어 영어까지도 등장한다. ‘최불암 시리즈’까지만 해도 조크의 ‘썰렁한’ 바탕으로부터 희미하게나마 어떤 ‘의미’를 추출해 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삼행시’에 이르면 ‘의미’는 완전히 증발해 버리고 없다.

















소통을 무시하는 독백

이러한 ‘썰렁한’ 최신 유행 시리즈들이 예전의 시리즈들과 다른 점은 대체로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는 것 같다. 첫째, 의미를 지향하지 않는다. 둘째, 개그의 담화 구성 원칙이 멋대로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소통을 무시하는 독백의 형식’이라는 점이다. 지난날의 개그 시리즈들은 화자와 청자의 상호 소통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왕왕 퀴즈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엉뚱하고 기발한 결론이 내려지기는 하지만, 퀴즈를 풀기 위해서 화자와 청자는 동일한 의미론적 체계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 어떤 예상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여전히 공공적 약호로 작동하며, 화자는 기발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서 화자가 움직이고 있는 의미론적 언어 지평과 같은 지평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이 시리즈들은 ‘대화’와 ‘소통’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최신 유행 시리즈들은 화자와 청자가 공유할 수 있는 의미론적 체계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담화가 구성된다. 어떤 원칙이 어떤 맥락에서 적용될지 청자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청자는 이 폭력적인 언어 게임에 전혀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가 없다. 담화 구성의 원칙은 화자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강요된다.

언어는 이미 공공적 약호가 아니다. 그것은 시니피앙1)의 물질성 안에 절대적으로 완강하게 머물러 있다. 그 시니피앙들은 의미의 유형자들이다. 의미는 더 이상 말들의 거주지가 아니다. 시니피앙들은 의미의 얼음판(언어현실로부터 ‘삶’이라는 세균을 완전히 소독시켜 버렸다는 의미에서 이 언어의 의미는 거의 완전히 추상화되어 있다) 위에서 죽죽 미끄러지는 물질적인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삼행시의 경우에는 앞서의 ‘썰렁함’과는 다른 특징이 가미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삼행시가 ‘최불암 시리즈’나 ‘사오정 시리즈’와는 달리 일종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에는 무질서하게 해체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삼행시 개그는 삼행시라는 틀거리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삼행시는 일종의 형식적 무형식인 셈이다.















형식적 무형식 또는 무의미 연습

글쎄, 대중은 무한히 열려있는 무의미의 무형식에 지쳤을까? 그래서 최소한의 형식을 요청하게 된 것일까? 이건 조금 너무 멀리 가는 해석처럼 여겨지기는 하지만, 이 형식인 체하는 무형식 안에 어떤 질서에 대한 욕구가 돌아와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무한히 열려 있던 기존의 개그들의 절대적인 무의미와 무형식에 어떤 질서가 필요해진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혹시 대중은 ‘무의미’를 담기 위해서 ‘의미있는 형식’이라는 그릇이 필요해진 건 아닐까?

굳이 삼행시의 형식적 연원을 따진다면, 삼행시는 보통 4행으로 이루어져 있는 전통적 시가(詩歌) 형식(서구에서는 소네트2)가 4행시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전 시가들이 4행시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의 한 귀퉁이를 부수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4행시의 형식적 근원은 분명하다. 그것은 4방위의 전체성을 지향하는 숫자이다. 옛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늘 우주를 흉내냈었다. 옛사람들은 인간의 삶은 신성한 형식을 베낌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삼행시는 일종의 절뚝발이 소네트인 셈이다. 이 절뚝발이 소네트의 썰렁함은 ‘3’이라는 숫자의 세속적 완결성으로 한번 더 확인된다. 사람들은 3이라는 가부장적 완결성의 숫자를 너무나 좋아한다. 성공을 기원하는 기업의 이름 중에서 3자를 찾아내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은 3의 왕국이다. 삼성, 삼보, 삼풍, 삼일, 삼화, 기타 등등. 이러한 맥락은 최근에 문화계 일반에 동시에 불어닥치고 있는 ‘복고적 상상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이제 현대적으로 사는 데 지친 것 같다.

사람들은 적당한 촌스러움(근사하게 말하면 직접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오래 기대고 살았던 안정된 형식을 찾아 되돌아가고 있다. 아마도 3행시라는 정형시의 구닥다리 형식적 발상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삼행시라는 그릇은 의미를 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의미를 담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차려진 밥상 위에 맹물 그릇들을 올려놓는 셈이다. 그 그릇들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긴다. 이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심코 이렇게 말해 놓고 나서, 나는 깜짝 놀란다. 아, 그렇구나, 나는 매사에 의미를 찾는 데 너무 버릇이 들어버렸구나. 어쩌면 바로 이것이 포인트인지도 모른다. 즉, 이 형식적 무형식은 일체의 절대적 의미가 사라진 현대인들이 세계의 무의미함을 견디는 하나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어쩌면 젊은 세대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강인한 세대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생의 근원적인 무의미함을 의미로 치환시키려고 애쓰지 않고 무의미 그 자체로 견디는 것을 연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중은 말들이 썰렁하게 충돌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생의 근원적인 허망함에 길드는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도 아버지도 진리도, 진리의 대체물인 이데올로기도 다 죽어버렸다. 따라서 진리의 담지자인 말도 죽었다. 죽은 말들이 좀비처럼 무의미를 생산하며 허공을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기, 무의미로 의미의 억압에 저항하기. 그렇다면 어쩌면 삼행시를 만들며 웃어대는 젊은 세대는 삶의 허망함 앞에서 전세대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까지 무의미의 터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이 무한히 열린 무의미를 견딜만큼 강인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의미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인간이 의미를 찾아 회귀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제 그 의미는 단 하나의 의미가 아니며, 또한 억압하는 의미도 아닐 것이다. 누구나 다 판사와 검사와 스포츠맨이나 배우가 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각자는 각자의 의미를 찾아 부드럽게 유턴할 것이며, 아주 가볍게 스치듯이 만날 것이다, 아마, 그 의미의 왕국은 10월과 11월 사이에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조락했지만,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다. 말들은 아직 의미를 생산해 낸다. 어쩌면 겨울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겨울의 얼음판 위에서도 착착 들러붙는 말의 매직 테이프를 개발해 내어 가지고 말의 겨울을 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의 일은 아니다. 그것은 시인들의 일이다.

주1)언어학자 소쉬르(Saussure, Ferdinand de, 1857-1913)는 언어[기호]를 운반체인 시니피앙(signifiant 記表, 표현)과 피운반체인 시니피에(signifie 記意, 내용)로 구별했다. 신호동의 빨강은 '파랑이 아님'으로 '서시오'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모든 언어는 기의(서시오)와 기표(빨강)의 관계호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주2)14행으로 된 대표적 정형시. 13세기 이탈리아 민요가 원형이며 그 아름다운 멜로디로 인해 연가로 자주 쓰였는데, 특히 F. 페트라르카. A. 단테등에 의하여 완성된 뒤 르네상스시대 유럽 전역에 유행하였다.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가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프랑스의 P. 롱사르, 독일의 P. 슐레겔 등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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