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제가 거주하는 캘리포니아 어바인의 가장 큰 극장 사우스 코스트 레퍼토리(South Coast Repertory)로 연극을 보러 갔습니다. <타이거 스타일!>이라는 제목의 연극이었는데요. 극장에 들어가자 객석에는 BTS 노래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막이 오르고, 중국계 미국인을 연기하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자신의 동양적 면모를 자조하는 코미디를 선보였습니다. 객석을 채운 백인 관객들은 배를 잡고 웃다가, 극이 끝나자 기분 좋은 박수를 배우들에게 보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극장을 떠났습니다.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있는 동안 저는 웃을 수가 없었는데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다양성을 강조하는 미국에 인종에 대한 연극이 올라갈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미국의 공연계 구조를 살펴보며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사우스 코스트 레퍼토리
사우스 코스트 레퍼토리는 동양인 비율이 높은 남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만큼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연극을 종종 올리는데요. 이번에 관람한 마이크 루의 <타이거 스타일!> 역시 중국계 미국인 극작가가 집필하고 필리핀계 미국인 연극인이 연출을 맡은 작품이었죠. 연출가 랄프 페냐는 아시아계 미국인 연극의 양대 산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마이 극단(Ma-Yi Theatre Company)의 공동창립자이기도 하여 <타이거 스타일!>은 오픈 전부터 기대를 모았습니다.
호랑이 부모님과 미국에서 살아남기
‘타이거’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고정관념을 대표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이거 맘(Tiger Mom)’ 또는 ‘타이거 패런팅(Tiger Parenting)’이라는 표현은 열성적이다 못해 공격적인 자녀 교육 방침을 일컫는 말로, 특히 학벌과 스펙 위주로 성공을 판가름하는 경향을 가리킵니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전반적인 동아시아의 교육열을 반영하기 때문에 동양에 대한 고정관념이기도 하지요. <타이거 스타일!>은 이러한 공격적 교육을 받고 자라난 중국계 이민 2세 자녀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제목부터 시작해서 <타이거 스타일!>은 고정관념의 집합체 그 자체입니다. 알버트와 제니 남매는 어린 시절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하버드에 진학해 알버트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제니는 의사가 됩니다. 이는 음악, 수학, IT, 의학 등 기계적 계산이나 혹독한 훈련에 기반한 분야에 특출 난 재능을 드러내는 동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반영한 것입니다.
부모님 말씀대로라면 이렇듯 모든 것을 가진 두 사람은 행복한 삶을 누려야 할 텐데요.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알버트는 쉬는 시간 없이 열심히 일하지만 노동력과 능력을 나태한 백인 동료에게 빼앗기고, 제니는 백인 남자를 만나 연애하지만 그는 이국적이고 순종적인 동양 여자 판타지에 맞지 않는 그녀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이렇듯 앞의 내용이 전형적인 고정관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었다면, 이후의 공연은 상당히 예측 불가하고 허구적인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알버트와 제니는 불행의 원인이 쓸모없이 동양적 이질감만 남긴 타이거 패런팅이었다고 결론 내리고 부모님께 찾아가 항의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남매는 미국 사회에서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여 중국에서 보금자리를 찾아보려 합니다. 중국어도 하지 못하고 중국 문화도 알지 못하는 제니와 알버트는 도착하자마자 가진 돈을 모두 잃고 중국 정부에 소속되어 일하게 됩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에 익숙한 두 사람은 독재 정부의 강압적 운영에 반항하다가 감옥에 수감되고, 어머니의 지인이 목숨을 내놓으며 돕는 것으로 겨우 탈출합니다. 미국 여권을 되찾을 수 없어 가짜 중국 여권으로 미국에 들어오려던 남매는 국경에서 입국 심사관에게 저지당합니다.
원작은 연락받고 달려온 부모님의 도움으로 미국에 무사히 입국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고 하던데, 제가 본 공연에서는 입국이 거절되는 결말을 맞았습니다. 해피엔딩을 원하지 않았던 연출가의 결정이라고 했습니다.
줄거리만 보면 공연 후반부는 상당히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일 것 같지 않나요? 하지만 실제로 후반부는 전반부보다 더한 웃음을 끌어냅니다. 어설픈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정글로 묘사되는 중국, 무릎을 꿇고 등장해 작은 키가 우스꽝스럽게 표현된 중국 공안. 남매를 탈출시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친척은 인사 대신에 뺨을 때리는 거친 중국인의 모습이고, 엘리트 남매는 국경에서 글을 모르는 소작농의 역할을 어설프게 연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연출가가 해피엔딩을 거부한 이유도 후반부가 지나치게 유쾌해서 관객이 내용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누구를 위한 인종극인가
한국의 객석에 젊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처럼, 미국도 특정 인구가 객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바로 중산층의 중장년 백인이죠. 아무리 연극이 대중적인 유희라고 해도, 정부 차원의 예술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관극을 즐길 수 있는 인구는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이 있는 중산층 백인 뿐입니다.특히 어바인과 같은 교외 지역은 대도시보다 이러한 경향이 더 뚜렷하게 드러나죠.
수익을 내어 다음 공연을 계속 올려야 하는 극장 입장에서는 중산층 백인의 취향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객의 반응에 예민한 극작가 또한 백인 관객을 염두에 두고 극작을 하게 되고요. 그렇기 때문에 인종에 대한 극을 올릴 때 창작팀은 백인 사회와 백인 우월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백인 관객을 만족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타이거 스타일!>은 백인이 직접 언급하기에 조심스러운 동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동양인 극작가와 연출가가 나서서 우스꽝스럽게 만듭니다. 이로써 백인 관객이 평소에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던 웃음을 마음껏 극장에 풀어놓을 수 있게 하지요. 아시아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장하는 것은 아시아인에게 충분히 허구적인 것으로 다가오지만, 이미 과장된 고정관념이 진실과 공존하는 백인 사회에는 풍자보다 소모적 웃음으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타이거 스타일!> 속 인종 문제는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고 개인적인 탐구에 그칩니다. 일례로 공연 속 세계는 동양인과 백인으로만 이루어진 모습이지요. 다른 인종은 등장하지 않는 이곳에서, 동양인의 많은 좌절은 백인이 되지 못함에서 발생하고, 마지막까지 알버트라는 백인 이름을 버리지 못해서 미국에 입국을 거부당하는 모습은 백인으로서의 내적 자아와 아시아계로서의 외적 자아의 충돌을 보여줍니다.
이때 아시아계 미국인과 아시아인의 차이도 눈여겨볼 지점입니다. 아시아계 미국인과 아시아인은 서로에 대한 나름의 동질감을 상상하지만, 실상 이 둘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지요. 극작가 마이크 루가 그리는 중국의 풍경은 아시아계 미국인의 간접경험 속 중국의 모습을 반영하는데요. 그것은 미국에 이미 팽배한 단순하고 전형적인 고정관념이 적용된 모습입니다.
필리핀계 미국인 연출가 랄프 페냐는 고증 오류의 문제에 대해 “<타이거 스타일!>은 아시아인이 아니라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연극이며 우리의 관객은 중국인이 아니다”라고 일축합니다. 어차피 과장된 코미디의 진행을 위해 소환된 중국을 굳이 진실에 충실하게 그려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에 대한 직접적 지식이나 이해가 없으면서 중국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아시아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민자와 외국인을 구분하지 않는 미국 문화 속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이 그려내는 동양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는 미국 관객에게 진실성 있는 표현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우리의 관객은 중국인이 아니다”라고 말하기에는 이미 세계화된 세상 속에서 이 극은 중국 관객을 만나기도, 중국인에게 간단한 고증을 받기도 쉽습니다. 인종 문제에 상당히 예민하고 오래 이야기해 온 미국이지만, 인종 연극에 있어서 주 관객층이 백인 중산층이라는 것과 아시아와 아시아계 미국인의 관계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는 과정이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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