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오래된 얘기이다. 우리나라에 방송이라는 것이 새로운 미디어로서 자리 잡던 시절. 저녁 9시만 되면 뉴스, 토요일만 되면 주말의 영화를 기다리던 시절. 사람들이 모이면 누구나 어제 본 드라마 세상 속의 파렴치에 욕하던 시절. 굳이 축구 경기를 보지 않아도, 한순간 동네가 떠나가라 환호가 들리면 아, ‘우리가 한 골 넣었구나’를 곧바로 알 수 있던 시절.
그 시절 방송은 과연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새삼 방송의 위기를 서슴없이 얘기하고, 당장의 생존에 대해 절박하게 얘기하는 방송 미디어 업계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대의 흐름이라며 미디어의 변화라며 그 모든 방송의 위기를 자연의 이치처럼 몰아가는 무책임함보다, 실질적인 위기는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이 우선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본질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방송 미디어란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이었을까?
계도를 위해 출범한 한국방송공사
최근 KBS에서 다큐멘터리를 하나 보게 되었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유명한 KBS 이태웅 PD의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 시리즈로 잠깐 시리즈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창고에서 탄생한 파격 다큐’라는 어느 저널의 프로그램 평론 기사처럼 직접 취재하고 촬영한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현재 KBS 수장고에 보관된 수십 년 세월의 방송 영상들을 통해 다양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다루는 시리즈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 방영된 편은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으로 제목에서 충분히 눈치챘겠지만 KBS 그 자체의 역사에 대한 중요한 순간들을 KBS 대표 아나운서 김동건 씨의 인터뷰와 함께 큰 흐름으로 바라보는 내용이었다. 겨우 46분의 다큐에 KBS의 50여 년 시간이 묻어 있는 엄청난 압축률만큼 시간이 빨리 지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1973년 “공무원에서 방송인으로, 한국방송공사의 출범”
작품 초반에 나오는 장면으로 그간 방송은 문화공보부의 한 축이었던 것에 비해, 이 때부터는 사실상 독립된 방송국으로서 KBS의 시작을 의미한다. 단순히 KBS의 출범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보다 한국방송공사 창립식에서 언급되는 KBS방송국 출범의 ‘목적’이 더 중요하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자면 생경하게도 언급되는 단어는 ‘방송 본연의 임무로서 <계도>’라는 점이다.
아직 관영의 그늘이 남아 있고, 상호 소통의 미디어가 아니라 상명하복의 미디어 인식이 일반적인 정서이던 시절의 KBS. 새마을운동에 대한 홍보, 80년 초 민주화 운동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며 그때의 방송 미디어 역할은 국민을 정권의 눈높이와 맞추는 것이 우선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컬러TV가 시작된 1980년, 그리고 같은 날 단행된 방송 통폐합을 통해 눈엣가시 같은 민간 채널을 흡수하며 3개 채널로 방송 미디어 공룡이 된 KBS는 줄곧 초창기 창립 정신인 ‘계도’의 미디어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변화하는 미디어의 기능
80년대 초반, TV 보급률은 가구 기준 87%에 이르렀다. 75년까지 보급률이 30%대였음을 감안하면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대부분의 가구에서 TV를 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정책적으로 밀어 부쳤던 초고속 통신망, 스마트폰의 보급과 같았던 현상이 그즈음에도 이미 있었다는 얘기다.
이때부터는 컬러의 시대와 맞물려, 대중들이 방송 미디어에 바라는 것이 조금씩 생겨났다. 일방적이고 재미없는 계도 형태의 메시지들이 진부해지고, 무언가를 새로운 것을 찾았던 것이다. 이와 함께 컬러 방송의 시대, 민간 방송과의 통폐합이 새로움의 자양분이 되면서 그간 딱딱하고 경직됐던 KBS의 변화를 이끌었다. 물론 계도를 위한 미디어의 메시지는 대체로 유지되어 정권 홍보성 땡전뉴스나 광주 민주화 운동 1주기에 맞춰 감추기 위해 조성된 축제 이벤트인 국풍81등도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미디어로서의 사건이 80년대 초반에 벌어진다.
1983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본래 아침 프로그램의 한 특집 코너로 1시간 30분의 기획 프로그램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38일, 453시간이라는 세계 최장기간 연속 생방송의 기록과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 된 프로그램이 됐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고, 또 가족을 잃어버린다는 개념을 갖기 어렵지만, 그때만 해도 6.25전후 30주년밖에 되지 않아 대다수의 국민이 여러 상실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가족의 상실은 무엇보다 봉합되지 못하던, 방법조차 찾지 못하던 마치 ‘방 안의 코끼리’ 같은 문제였다.
하나의 가족 사연만 봐도 눈물이 그치질 않는데, 그런 가족들의 사연이 방송국 본관 외벽, 손 닿는 모든 곳은 물론이고 여의도 공원까지 뒤덮였다. 더욱이 각자의 사연을 가진 수만의 벽보들 위에는 그 어떤 것도 덧붙여지지 않아, 마치 서로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상징으로서 큰 감동 포인트가 되었다. 100번째, 1,000번째, 8,000번째 가족 상봉이 일어나면서 방송 미디어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이 이벤트는 이후에도 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으로까지 이어지는 큰 족적을 남겼다.
다시 보는 미디어의 정의
아마도 우리나라의 방송 미디어가 대중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신뢰를 쌓게 만든 근간에 가장 큰 작용은 ‘이산가족 찾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후에도 프로그램 말미에 담긴 김동건 아나운서의 마지막 말처럼 대중, 국민을 위해 KBS가 승승장구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한때는 다시 평화에 반하는 아이러니한 이벤트인 평화의 댐 모금 등을 나서서 하기도 했고, 군부 독재 이후로는 경제 권력의 입장을 대변해 주기도 했다. 다만 그 시대의 거울로서 방송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으며, 외환위기나 자연재해 상황에서 이겨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됐음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을 해보겠다. 사람들에게 방송 미디어란 무엇일까? 그 찬란했던 방송 미디어의 시절만큼 우리의 부족함을 이해하는 미디어, 또 그것의 해결 방법을 고민하는 미디어의 선한 작용을 지금 기대해 볼 수는 없는 걸까? 특히 코로나19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 과거의 아픈 시절과 다를 것 없는 상실과 절망에 허덕이는 지금, 다시 방송 미디어는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아닐까? 예능과 드라마의 잘됨과 안됨을 구별하기에 앞서, 방송 미디어의 고민은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나무위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KBS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 - 정성을다하는국민의방송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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