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환상은 반대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에는 환상이 필요하고, 환상은 현실에서 출발해야 아름다워집니다. 12월이면 만나게 되는 산타클로스. 마케팅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걸 알지만 많은 사람이 산타클로스를 반가워합니다. 현실에는 아무 조건 없이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선물을 주는 존재는 거의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른이 돼도 반가운 존재입니다. 환상은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환상이 현실을 떠나 멀리 있다면 위안이 될 수 있을까요? 그야말로 ‘가상’이 되기에 감흥을 주긴 어려울 겁니다. ‘현실에 있을 법한,’ 내 인생에 일어날 것 같은 이야기, 환상은 현실에서 못다 이룬 일을 대신 이뤄줄 때 가장 큰 감동이 됩니다.
현실과 환상, 반대의 뜻을 지녔지만 가장 조화로워야 하는 존재입니다.
존루이스가 만든 환상
올해도 어김없이 존루이스의 크리스마스 광고가 공개됐습니다. 작년과 달리 다시 아이와 동물의 우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잠시 아이와 동물의 동화를 잊고 엘튼 존의 이야기를 다뤘던 작년 광고. 하지만 역시 많은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기엔 어린이와 동물의 동화만한 게 없겠지요.
존루이스와 슈퍼마켓 브랜드인 웨이트로즈가 함께 만든 캠페인. 어린 소녀와 친구인 공룡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공룡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죠. 흥분하면 자기도 모르게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겁니다. 2분 30초짜리 이 동화의 제목도 ‘흥분 잘하는 에드가’입니다.
겨울이 찾아온 마을은 크리스마스 준비로 분주한 풍경입니다. 아이들은 얼어붙은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마을 사람들은 멋진 나무를 구해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죠. 공룡인 에드가는 그 풍경이 너무 반가워 스케이트장으로 뛰어듭니다. 하지만 너무 기쁜 나머지 불을 뿜어버리죠. 순간 호수는 모두 녹아 버리고 아이들은 물에 빠집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성스럽게 준비한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모여 크리스마스의 시작을 기념합니다. 역시 에드가는 불을 참지 못합니다. 공룡이 뿜은 불에 트리는 불타서 앙상해지죠. 사람들은 그때부터 에드가를 피하기 시작합니다. 에드가 또한 낙심해서 집안에 틀어박혀 지냅니다. 소녀는 그런 에드가를 위해 아이디어를 냅니다.
마침내 찾아온 크리스마스. 모두 모여 즐겁게 만찬을 나누는 사람들. 그때 에드가와 소녀가 나타납니다. 순간 사람들은 불이 무서워 소란을 피우지만, 아주 잠깐입니다. 에드가가 크리스마스 푸딩에 불을 붙여 선물하며 자신이 얼마나 마을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는지 보여줬으니까요. 크리스마스 저녁엔 푸딩을 먹는 풍습이 있는 영국. 푸딩을 먹기 전에 브랜디를 끼얹어 불을 붙인 후 먹는다고 합니다. 에드가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쉽게 불을 붙여 푸딩을 선물한 겁니다. 사람들은 환영의 박수를 치죠. 푸딩은 선물이자 배려의 상징입니다. 펭귄 몬티의 이야기만큼 눈물 나진 않지만 존루이스다운 귀여운 동화입니다.
에드가는 TV광고와 극장, 온라인 그리고 ITV의 프로그램 공지 화면에 맞춰서 등장한다고 합니다. 물론 존루이스 백화점에서 인형과 슬리퍼, 파자마와 동화책으로도 만날 수 있고요. 스냅챗에선 불을 뿜는 드래곤 렌즈와 이모티콘으로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동화는 백화점과 슈퍼마켓의 상업성을 띠고 태어났지만, 영국의 현실에서 출발했습니다. 브렉시트의 찬반과 여러 가지 분열이 과열됐던 영국,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배려 깊게 행동하고 대접하고 선물하면서 ‘즐거운’시간을 맞자는 의도에서 제작했다고 합니다. 불을 뿜는 용은 ‘다름’을 상징하는 캐릭터인 거죠. 에드가는 ‘융화’를 얘기하는 매개체입니다.
이 광고가 공개되자 24시간 내 어김없이 패러디물이 등장했습니다. 영국의 온라인 언론사인 PoliticsJoe는 공룡 얼굴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 얼굴을, 소녀에겐 스웨덴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의 얼굴을 합성했습니다. 물론 24시간 내 만들었기에 완성도는 조악합니다. 트럼프 공룡은 많은 얼음들을 녹이며 즐거워합니다. 소녀는 그런 공룡을 매우 못마땅해 하죠. 그리고 존루이스 광고의 카피와는 정반대로 “당신이 얼마나 신경을 안 쓰는지 보여주라”고 합니다.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파리협정을, 트럼프 미 대통령이 탈퇴한다고 공식 선포한 것을 비난하는 이야기입니다. 불을 뿜는 공룡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매우 적절한 패러디이긴 합니다.
▲ 존루이스 광고 영상에 화답한 버거킹(출처: 버거킹 공식 트위터)
이 외에도 불을 뿜어 크리스마스 푸딩에 불을 붙인 걸 보고 버거킹은 역시 불을 뿜어 만드는 그릴의 맛이 최고라며 존루이스의 트위터에 화답합니다. Aldi나 막스앤스펜서 또한 존루이스 광고에 대해 서로 재미있는 트윗을 주고받습니다.
소비자뿐 아니라 여러 업계에서 관심을 갖는 걸 보면 존루이스 광고는 누구나 기다리는 연례행사인 듯합니다. 존루이스의 환상은 많은 이들의 화두가 된 것이죠.
앵그리버드가 화를 다루는 방법
세계적으로 45억 다운로드를 기록한 인기 게임인 앵그리버드. 12월 11일은 앵그리버드 게임이 출시된 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들은 이 특별한 해를 기념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모토인 “화를 내도 괜찮다”라는 정신에 맞게 화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캠페인을 벌이는 거죠. 앵그리버드가 대행사인 드로가5에게 요구한 캠페인 목적은 타깃을 넓힐 수 있는 캠페인이었습니다. 그동안 게임을 하던 아이들은 나이가 들었고 더 이상 SNS에서 활발하게 공유하고 나누는 계층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인데요. 그들은 밀레니얼들에게 게임을 어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드로가5는 전기 스쿠터 회사인 스핀과 협업, 특별한 스쿠터를 만들었습니다. 이른 바 ‘분노의 라이더(The Rage Rider).’
스쿠터가 움직이는 원리는 간단합니다. 스쿠터에 부착된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거죠. 당신이 더 크게 화내고 소리 지를수록 스쿠터의 속도는 더욱 빨라집니다. 스트레스를 분출하고 싶은 만큼 분출하면 속이 시원해지는 거죠. 그들은 분노를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이 기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스쿠터는 누구나 만날 수 없습니다. 이 특별한 스쿠터는 단 100대만 만들어져 엄격하게 선정된 인플루언서들에게 배포됐습니다.
11월 21일, 뉴욕 타임스퀘어엔 ‘분출 자판기’가 등장했습니다. 단순한 자판기(vending machine)가 아니라 분출하는 자판기(venting machine)입니다. 역시 자판기를 움직이려면 당신의 화가 필요합니다. 소리를 질러도 되고, 흔들어도 되고, 주먹으로 쳐도 되고. 오늘 당신을 화나게 한 다양한 상황들을 생각하면서 자판기에 분출하는 거죠. 그러면 자판기는 상품을 내놓습니다. 역시 스쿠터처럼 화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면서 카타르시스를 얻자는 의도입니다.
화가 많은 시대, 앵그리버드는 화가 오히려 상품이 되고 재미가 되는 환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화를 내도 되는 세상. 앵그리버드가 만든 환상적인 세상입니다.
코카콜라가 다룬 현실
아르헨티나에서 만든 코카콜라 크리스마스 광고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코카콜라는 한 남자를 묘사합니다. 미지의 땅에서 온 낯선 자이며 우리 집에 몰래 침입해 들어오고, 존재를 숨기기 위해 밤에 이동하는 자. 우리에 대한 정보를 모은 후 수상한 보따리를 밀수해 들어오는 자. 누구일까요? 듣기엔 범죄자이거나 마약 딜러 같기도 하지만, 누구나 환영하는 산타클로스입니다. 관대하고 부드러우며 누구에게나 친절한 산타클로스. 코카콜라는 수상한 시각으로 보면 산타클로스조차 이상한 사람이 된다는 데 이야기의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니 낯선 이를 환영하라고 권하죠.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볼 줄 안다면, 서로 어떻게 다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캠페인은 ‘서로의 다름’을 다룹니다. 코카콜라 홀리데이 광고로는 처음으로 정치적인 색깔을 띤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미국의 이민자 정책을 감안해 나온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광고는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졌지만, 콜롬비아, 에콰도르, 과테말라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미국에서도 방영될 거라고 하니까요.
늘 행복을 나누자고 하던 코카콜라가 한 단계 더 나아가 다름을 포용하자고 합니다. 현실이 환상처럼 따뜻해지길 바랍니다. 함께 나누면 나눌수록 우리의 힘은 한층 더 강해질 거라는 메시지를 더하면서.
우리는 모두 환상가입니다
‘팩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팩트 폭행. 팩트가 얼마나 가혹하면 이런 말이 생겼을까요? 누군가에게 단순히 ‘팩트’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크리스마스엔 산타가 오지 않는다고, 가짜라고 말한다든지. 로또를 사는 수많은 어른에게 당신은 결코 당첨되지 않을 거라고 한다든지. 환상을 밟고 없애는 방법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새로운 해를 시작하고 다시 새롭게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새해에는 뭔가 행운이 생길 거라는 환상, 모든 일이 잘되고 좋은 사람만 만날 거라는 환상, 아무도 몰라주는 내 재능이 빛을 볼 거라는 환상. 각자의 환상을 품고 살아가기에 세상은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동화와 해피엔딩과 가사와 점괘들은 모두 환상입니다. 그런 것들에 위안을 얻는 우리들은 환상가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다소 뻔하고 클리셰 같지만, 수많은 브랜드가 만남과 행복과 사랑을 다루는 캠페인을 펼칩니다. 환상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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