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fference
‘사실 판단’ vs ‘가치 판단’의 차이
차이는 나를 달리 세울 수 있게 한다. 다르게 선 사람끼리 관용하는 것은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다르면서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역설이다. ‘동일성’이 같아지기를 요구하여 달라질 권리를 주지 않지만,‘ 차이’는 달라지기를 요구하지만 같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하다니.
같은 말이라도 ‘어’ 다르고 ‘아’ 다르다. 하나의 말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차이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차이 때문에 심한 상처를 받아 자살을 결심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차이 덕분에 자신의 존재감을 더 높일 수도 있다. 엄청난 실적 차이 앞에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다른 사람에 없고 어떤 사람에게만 있는 능력의 차이로 인해 주목을 받을 수 있다.
아울러 철학에서 차이가 서양 근대성의 비판 맥락에서 주목되고 있다. 서양의 근대가 유일하고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되면서 비서양은 가져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한 미개 상태로 규정됐다. 이처럼 복수의 근대가 인정되지 않았던 탓에 ‘서양 = 근대’,‘ 비서양 = 전근대’의 도식이 널리 퍼졌다. 나아가 이 도식은 서양에 의한 비서양의 침략마저 계몽이나 역사발전의 의미로 정당화되었다. 이를‘ 동일성의 철 ’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서양의 문화와 가치 체계가 동일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미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가진 의미로 긍정될 때 차이의 논리가 들어선다.
이처럼 우리는‘ 차이’로 인해 불편할 수도 있고 편안할 수도 있으며, 억압될 수도 있고 해방될 수도 있고, 획일적일 수도 있고 창조적일 수도 있다. 전자보다는 후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라도 차이가 무엇인지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문제로서의 차이
우리 사회의 조직문화와 관련해서 널리 쓰이는 말을 생각해보자. ‘일사불란한 조직’, ‘단일민족’,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검사 동일체’, ‘복지부동’, ‘눈치 문화’, ‘상명하복’…. 이 이외에도 비슷한 말이 많다. 물론 이들은 쓰이는 대상과 장소, 그리고 의미가 각각 다르다. 조금만 꼼꼼히 생각해보면 이 말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같은 것을 바라고 다른 것을 싫어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안건과 의제를 두고 사람들이 이른바 ‘계급장’을 떼고 더 나은 합리성을 위해 토론하기보다는 하급자는 상사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숱한 외침을 받았고 조선의 건국에 여진족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단일민족이었고 앞으로 단일민족이어야 한다고 한다. 혼혈이 사실이지만 단일 혈통에 사로잡히면 앞으로도 사실과 맞지 않은 믿음을 굳게 지키겠다는 것이리라.
우리는 직장에 처음 출근하는 사람에게‘ 튀는 행동 하지 마라!’라는 비밀을 알려준다. 이 말의 밑바닥에는 다수의 흐름에 묻어가야지 혼자 나서서 왈가왈부하다보면 비난의 화살을 맞을 수 있다는 의미가깔려있으리라. 따라서 직장생활은 달라서는 안 되고 같아지려는 욕망에서 출발하게 된다. 이렇게 해놓고 ‘요즘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이 없어!’라고 한다면 신입은 더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언제는 나서지 말라고 했다가 지금은 나서지 않는다고 불평이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한국어 사전을 들춰보면 ‘차이’는 ‘서로 어긋나거나 다름 또는 그 간격’으로 되어 있다. 반면 영어사전에는 ‘unlike in nature or quality or form or degree(성질 또는 질 또는 형식 또는 정도에서 다르다)’로 되어있다. 영어와 달리 한국어에서 차이는 꽤나 불편하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차이를 그냥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말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어긋나다’라는 가치 지향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차이란 ‘같은가 다른가라는 사실 판단’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옳은가 그른가’라는 가치 판단을 가리키고 있다.
이처럼 차이가 반듯하고 올바른 정(正)의 길이 아니라 어긋나고 삐뚠 사(邪)의 길을 가리키는데, 누가 감히 차이를 가지려고 하겠는가?
이런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성적 차이’와‘ 실적 차이’의 차이는 너무나도 불편하다. 차이가 단순히 성취의 미흡이 아니라 존재의 결격 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뭔가 가져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아무런 압박 없이 계속 산다는 게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지 않은가! 이렇게 차이가 사람을 질식시키고 있다.
다양성으로서의 차이
우리 사회에는 차이에 대한 또 다른 목소리도 많다. 면접 심사에서 “남들에게 없는 당신만의 특징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 많이 나온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상품으로 개발해서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화원을 찾아가서 “이곳은 주위 꽃들과 참으로 달라서 예뻐!”라며 꽃을 사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획일성의 특징을 강하게 지니면서 어떻게 개성을 중시하는 흐름이 생겨났을까?
첫째, 산업 분야에서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뭔가 남과 달라야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가 있다. 날마다 수많은 신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밋밋하여 조금이라도 눈길 끌만한 게 없다면 금방 사람들에게 잊힌다. ‘다르니까 살아남는 것’이다. 아니 ‘달라야 한다’는 명령이다.
둘째, 사람들의 관심사가 어떤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이것저것으로 확산되고 있다. 옛날 전화기는 단순히 통신기계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자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금은 전화기가 넘쳐날 뿐만 아니라 전화기를 대체할 만한 숱한 관심사가 생겨났다. 이렇게 사람의 관심사가 늘어나고 자꾸 다른 것으로 바뀌다보니 어떤 것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향해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게 된다.
모순 없는 차이
시각이 바뀌면 세계가 달라진다. 동일성은 사람을 단일한 기준으로 회귀하게 하고 일치하기를 요구한다. 차이는 다른 것에 단일한 기준으로 변화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아울러 다른 것과 다른 것이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차이는 필연적으로 다원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차이가 다른 것에 대한 개입을 배제하고 관용으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밀실과 성채의 구축을 정당화시키지는 않는다. 광장[시장] 없는 밀실은 개성의 개화가 아니라 고착화를 낳기 때문이다.
차이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그 자극이 광장의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차이는 나를 달리 세울 수 있게 한다. 다르게 선 사람끼리 관용하는 것은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다르면서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역설이다. ‘동일성’이 같아지기를 요구하여 달라질 권리를 주지 않지만,‘ 차이’는 달라지기를 요구하지만 같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하다니. 결국 사람은 그 수만큼 다르고 그 자체로 우주인 것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 xhinjg@hanmail.net
서울대 철학과, 동대학원 박사.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이며, 사단법인 선비정신과 풍류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양철학의 유혹>,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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