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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광고기사를 쓰고 있지만, 광고회사에서 글을 부탁할 때마다 참 난감해진다. 기자들이 자기가 쓰는 기사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하지 못하다가 가끔 깜짝깜짝 놀라는 것처럼, 광고인들도 혹 자신이 만드는 ‘광고’의 영향력이 얼마나 엄청난 지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억지생각으로 그 난감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려고 한다. 내부인들에게 전해 보는 국외자 (outsider)의 한마디쯤이라고 하면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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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아이를 꼬이다 |
프랑스의 유명한 광고인 로베르 궤링은 “우리가 숨쉬고 있는 공기는 질소와 산소, 그리고 광고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광고 속을 헤엄쳐 다닌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광고를 보면서 자란 거의 1.5세대쯤에 해당하는 나에게는 이 말이 실증적으로 다가온다.
국내 광고산업이 꽃피기 시작한 70년대 중반에 초등학교를 다닌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각양각색(흑백화면이었지만)의 광고에 빠져들었었다. 평일 저녁 6시의 <우주의 왕자 빠삐>, <철인 28호>, <밀림의 왕자 레오>, <마린보이>, <왕거미>, 그리고 주말에는 <마징가 제트>, <슈퍼특공대>, <서부소년 차돌이> 등을 방영하기에 앞서 내보내는 몇 편의 광고들은 만화영화를 보기 직전의 기대감으로 약간 흥분한 상태에 빠져있던 내게도 광고 본래의 기능인 ‘정보’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었다.
“아빠, 오실 때 줄줄이. 엄마 오실 때 줄줄이” (줄줄이 사탕), “자신의 일일랑 자신이 하자” (우등생 사탕), “엄마,아빠도 함께 투게더,투게더” (퍼모스트 투게더 아이스크림), “하늘에서 별을 따다,하늘에서 달을 따다” (오란씨), “좋은 사람 만나면 나눠주고 싶어요” (롯데껌), “12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등의 CM송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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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새로운 사탕이나 과자 광고를 보는 날이면 구멍가게로 달려가 광고에 나온 그 사탕을 먹어보나 하는 들뜬 기대감으로 며칠을 보내곤 했다. 포장지 안에 매번 다른 스티커가 붙어있어 속이 달도록 사먹었던 ‘왔다 쵸코바’ (스티커만 100개 가까이 모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어린아이를 꾀는 대단한 상혼 이었다. 사실 맛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이후 맛이 훨씬 좋은 ‘나하나 쵸코바’가 나오자 ‘왔다 쵸코바’는 시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를 처음 접한 것도 홍길동 스티커 광고가 나를 꾀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포켓몬스터 스티커가 들어있는 빵이 아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해 아이들이 스티커를 모으느라 안에 있는 스티커만 빼내고 빵은 버려 어른들이 장탄식을 한 일도 있었는데, 난 그 사실을 접하고 20여년 전 일이 가물가물 생각나 속으로 좀 뜨끔(?)했다.
이외에도 커다란 호랑이가 포효하던 범표 신발 광고, 기차소리가 요란했던 기차표 케미슈즈 등 나이키가 나오기 이전의 토종 신발광고들. 그리고 그땐 무엇을 광고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뉴 후리덤’ 광고에 이르기까지 (극장광고에 나온 ‘먹지않는 피임약’이라는 광고카피를 보고서도 오랫동안 ‘그럼 바르는 약인가보다’하고 짐작하곤 했었다. 미성년자관람가 영화는 상영광고에도 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요즘 미성년자들은 좀 다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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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소년의 넋을 빼앗다 |
조금 야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나만이 알고있는 사랑의 비너스, 아름다운 비너스. 비너스 부라쟈, 비너스 거들, 비너스 올인원. 아름다운 나만의 비너스 화운데이션” 속옷 광고도 유년시절 광고의 중요한 한 곳을 차지하고 있다. 속옷광고는 최근까지만 해도 ‘노랑나비’ 이승희가 웃통 벗고 설치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마네킹이 등장하거나 신체 부분모델들이 나오곤 했는데, 이 광고는 유명 여자탤런트 (요즘에는 주로 중년주부로, 가끔 할머니 역으로도 나온다.
아,세월의 무상함이여)가 직접 나와 속옷 입은 자신의 몸맵시를 뽐내며 손바닥으로 허리와 엉덩이를 훑어내리는 등 당시로는 엄청난 파격과 선정성의 극치를 이뤘던 광고였다. 어떻게 심의를 통과했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개구쟁이 사내아이들의 입에 이 CM송은 자주 오르내렸고, 소풍날 장기자랑 시간에는 이 노래를 기기묘묘한 모션과 함께 부르는 녀석이 꼭 한두 명씩은 있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계집애들은 왜 그리 비명을 질러댔는지. 나는 지금도 ‘올인원’, ‘화운데이션’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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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에 나오는 예쁜 누나들에 넋이 나가 ‘나도 저런 누나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가슴 한쪽이 허전했던 기억도 광고가 가져다준 또다른 추억 (?)이기도 하다. 그런데 비단 나만 그러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우리반 아이 중 하나는 “벨라는 나의 꿈, 아름다운 날개여. 코오롱 벨라, 숙녀복은 벨라”라는 별 특색도 없는 CM송을 자습시간마다 지겹도록 불러제껴 그때의 멜로디와 가사를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박히도록 만들었다.광고는 중고교 시절에도 나를 따라다녀 ‘누가 나이키를 신는가’라는 나이키 광고, 그리고 테니스장면을 통해 스포츠의류 엑셀을 광고하던 조용원 광고 등이 지금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어린 시절 나의 감수성을 키워왔던 것 중 하나가 ‘광고’였다. 물질문화의 총아인 ‘광고’가 정신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이기도 하다.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린 시절 럭키치약 광고는 늘 칫솔 윗부분을 가득 덮을 만큼 잔뜩 짜넣은 모습이 온 화면을 차지했다. 난 원래 치약을 그렇게 많이 써야 하는 것인 줄 알았고, 지금도 광고에서 보여준 것과 똑같이 치약을 많이 짜낸다. 광고는 이처럼 사람의 ‘세살 버릇’까지 키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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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사람 살리다 |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한번 보자. 광고는 사형수를 살려내기도 한다. 이탈리아 의류업체 베네통사는 지난 99년에 미국의 사형수 26명과 인터뷰한 뒤 그 중 6명을 광고모델로 선정해 전세계에 ‘우리는 사형수다’라는 제목으로 광고를 내보냈다. 그런데 독일의 다크라르 폴친(32세)이라는 여성이 함부르크의 버스정류장에서 이 광고판에 나온 남자모델인 사형수 바비 리 해리스 (34세)를 보고 갑자기 사랑에 빠졌다. 폴친은 지난해 9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교도소에 수감된 해리스를 만났고, 결혼허가 신청까지 했다. 이들의 애타는 사랑이 알려지자 원래 지난 2월 19일로 예정되었던 해리스의 사형집행이 연기됐다.
몇 년 전 그레이스백화점이 ‘미시’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난해함은 ‘닉스’ 청바지 광고가 가장 잘 설명해줬고, 92년 우황청심원 광고에 등장한 판소리 명창 박동진 씨의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한 마디에 ‘신토불이’ 바람이 일기도 했으며, 현대증권 ‘바이코리아’ 광고는 ‘주식투자=애국’이라는 이상한 도식을 기정사실화해 증권투자 열기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왕따 근절하자’는 백마디 말보다 오리온 초코파이 ‘정’ 광고가, 지하철 경로석은 ‘지킬 것은 지킨다’는 박카스 광고가,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 제고에는 LG텔레콤(019)의 농아소녀 고운이 양의 수화 광고가 더 큰 기여를 했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라는 에이스침대 광고로 초등학교 아이들이 무더기로 시험문제를 틀렸고, 최근엔 ‘핀란드에선 자기 전에 껌을 씹는다’는 롯데 자일리톨 껌 때문에 관계당국이 자기 전에 껌 씹는 것은 치아건강에 좋지 않다는 점을 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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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경우를 봐도 쿠카이·오바드·샤넬 광고가 유럽에서 어느 나라 여성장관들보다 훨씬 더 여성의 자유를 위해 공헌했고, 코카콜라·맥도날드·리바이스 광고는 ‘자유와 풍요’를 상징하는 미국문화의 전도사가 된 지 오래다. 또 노르웨이에선 미국 모델 앤 니콜 스미스의 광고포스터로 교통체증이 유발돼 고속도로변에 설치한 포스터를 떼내야 했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선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친 클라우디어 쉬퍼의 광고판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절도범이 되기도 했다.
지난 64년에는 데이지 꽃잎을 세고 있는 어린 소녀가 멀리서 들리는 핵폭탄의 카운트다운 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데이지 광고’가 민주당의 린든 존슨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광고는 나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추억과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어떤 광고가 ‘좋은 광고’인지, 그리고 또 어떤 광고가 ‘나쁜 광고’인지 구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작업을 하는 광고인들이 광고의 역할을 단순히 ‘물건 많이 팔아먹기’ 위한 수단으로만 국한시킨다면 자신의 영향력을 너무나 과소평가하는 것 아닐까? 이 한 마디를 말하려, 많은 사례를 언급했을 뿐이다. 또 하나. 내 어린 시절 뜨락의 한 곳을 장식해준 ‘그 광고들’을 만들어준 광고인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
광고...
그러나 광고는 어디까지나 ‘예술작품’이 아니므로 남의 돈으로 마케팅은 도외시한 채 자기만족적인 광고를 만드는 것은 개인적으로 아주 싫어한다. 그런 광고는 표가 난다. ‘남들이 싫어하는 광고’는 이미 ‘광고’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요즘 들어 만든 사람만 나르스시즘에 빠진 채 흐뭇해 하는 광고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 아쉽다. 좋은 광고가 마케팅에서 실패하는 법은 그리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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